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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소성 전투

제목 매소성 전투
한자명 買肖城戰鬪
유형
시대 통일 신라와 발해
관련국가 통일 신라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675년(신라 문무왕 15년) 신라와 당(唐)이 매소성(買肖城)(현재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楊州市) 고읍동(古邑洞)이나 양주시 유양동(維楊洞), 또는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청산면(靑山面)의 대전리 산성(大田里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에서 벌인 전투로, 신라가 나당 전쟁(羅唐戰爭)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된 전투.

[내용]

신라와 당은 648년(신라 진덕 여왕 2년) 군사 동맹을 맺으면서, 대동강(大同江) 이남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땅에도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다. 나아가 신라 땅까지 병합하려는 욕심을 드러내자, 신라는 당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였다.

670년(신라 문무왕 10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나당 전쟁은 대체로 당군의 우세 속에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당의 서쪽에서 토번(土蕃)이 성장하여 당을 위협하자, 당은 대신라전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였고, 신라는 이 틈을 타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도 하였다. 673년경에 이르면 대체로 임진강(臨津江) 지역을 경계로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당나라는 675년 유인궤(劉仁軌)를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신라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신라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675년 2월 유인궤 군대에게 칠중성(七重城)을 빼앗기고 말았다. 칠중성 전투 이후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이 기병 7만을 포함한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매소성 부근에 주둔해 있었다.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식량 보급도 여의치 않아 당군의 상황은 좋지 못하였다. 이를 간파한 신라가 매소성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자, 이근행 군대는 말 3만 380필과 많은 무기를 버리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매소성 전투(買肖城戰鬪)로 나당 전쟁의 승기를 잡은 신라군은 이후 기벌포 전투(伎伐浦戰鬪)에서 크게 승리하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고구려 원정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전쟁을 지속하면서 내부 여론이 악화된 당은 서쪽 토번과의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신라와의 전쟁을 그만두었다.

[의의]

매소성 전투의 승리는 뒤이어 벌어진 기벌포 전투의 승리와 함께 신라가 나당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를 발판으로 신라는 당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 관련자료

ㆍ매소성(買肖城)
ㆍ매소천성(買蘇川城)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