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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

제목 조운
한자명 漕運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조만(漕輓), 조전(漕轉), 해조(海漕)
별칭•이칭

[정의]

각 지방에서 현물(現物)로 거둔 세금을 한양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마련한 수상 운송 제도.

[내용]

우리나라 전통 시대의 세금은 대부분 화폐가 아닌 현물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미곡(米穀)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를 중앙 정부로 이송하는 방법으로는 육로를 통한 육운(陸運)과 강과 바다를 이용한 조운이 있는데, 한꺼번에 많은 양을 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운이 효율적이었다. 이에 따라 고려 시대에도 전국적인 조운망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 본격화된 왜구의 침공으로 조운이 거의 파괴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건국 이후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조운의 재건이 시도되었다. 전국에 세금을 집결시키는 창고인 조창(漕倉)을 만들고, 조창에서 서울을 오갈 조운선을 본격적으로 건조하였다. 또한 백성들에게 국역(國役)을 부과하여 이들 배를 운영할 선원, 즉 조졸(漕卒)을 편성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태종 대 최초로 조운선을 통해 세곡 운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운은 수로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항상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해로(海路)를 통한 조운선의 왕래가 문제가 되었는데, 서해안의 태안 앞바다 안흥량(安興梁) 인근은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이에 따라 안흥량 인근에 운하를 파는 방법이 논의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무위에 그쳤다. 대안으로 육운, 즉 육상 운반을 시도하였으나 인력이 너무 많이 들어 몇 번의 시도 끝에 다시 조운을 이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꾸준히 조운을 이용하여 세금을 운송하였다.

조운은 조창의 위치에 따라 몇 개의 노선이 존재하였다. 전라도에는 영광의 법성포(法聖浦), 나주의 영산창(榮山倉), 함열의 덕성창(德成倉)에 조창이 있어 해로를 통해 서울로 곡식을 운송하였다. 충청도에는 아산의 공진창(貢津倉)과 충주의 가흥창(可興倉)이 있었는데, 공진창에서는 서해를, 가흥창에서는 남한강을 통해 서울로 운송하였다. 북한강 유역에서는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과 원주의 흥원창(興原倉)이 강원도의 조세를 운송하였으며, 황해도 강음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은 해로를, 배천의 금곡포창(金谷浦倉)은 내륙 수운을 통해 운송하였다. 국방상의 요지인 함경도와 평안도는 조세를 해당 지역의 군수 물자로 사용하도록 하여 서울로 운송하지 않았고, 경상도는 남부 지역의 경우 동래부에서 수납하고, 내륙에 인접한 북부 지역의 일부는 충주 가흥창에 조운을 이용하여 세금을 납부하였다.

이처럼 조운은 국가 재정과 직결되었기에 조선은 제도 정비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조선 후기에 세금을 돈으로 납부하게 되면서 서서히 폐지되었다.

▶ 관련자료

ㆍ조운(漕運)
ㆍ조운로(漕運路)
ㆍ조운선(漕運船)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