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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

제목 갑자사화
한자명 甲子士禍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504년(연산군 10) 갑자년(甲子年)에 능상(陵上)의 풍조를 일소한다는 명분하에 조정 신료들을 도륙했던 사건.

[내용]

성종(成宗, 재위 1469~1494)과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의 재위기 동안 조선에서는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의 3사(三司)가 담당하고 있던 언론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연산군은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3사의 기능을 제한하고 사대부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했다.

이후 연산군의 전횡이 심해지자, 3사는 연산군에 대한 간쟁의 수위를 높여 갔고, 대신들 또한 연산군의 실정에 대해 논하며 시정을 요구했다. 결국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행위와 폐비 윤씨 사건의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우선 연산군은 국왕에게 불경한 행위를 했다는 명분으로 홍귀달(洪貴達)을 강원도 영월로 귀양 보냈다. 이후 성종의 후궁들은 물론 윤씨의 폐위와 사형에 찬성했던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을 처형했다. 이미 죽었던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 등의 인물들은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 갑자사화의 규모와 처벌 방식은 매우 크고 참혹했다. 현직 대신과 3사의 신하들은 물론 이미 사망한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쳤기 때문이다.

[의의]

무엇보다 지나치게 잔혹한 처벌들이 시행되면서 사건의 참혹성을 증가시켰다. 갑자사화를 통해 성종의 재위기에 형성되었던 신진 사림들이 수난을 당하면서 이들의 정치⋅학문적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 관련자료

ㆍ갑자사화(甲子士禍)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