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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

제목 사병
한자명 私兵
유형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고려, 조선
유의어 족병(族兵), 가병(家兵)
별칭•이칭

[정의]

국가가 제정한 군제(軍制)에 편성되어 있지 않고, 개인 혹은 사적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군사 집단.

[내용]

사병은 주로 조정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국가 제도가 문란해지는 시기에 나타났다. 역사적으로는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 무신 집권기,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사병의 구체적인 양상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하대에 힘을 가지고 있던 진골(眞骨) 귀족들은 개인적으로 사병 집단을 조성해 격렬한 왕위 계승 다툼을 벌였다. 유력 귀족들이 사병 집단을 거느리고 있는 상황은 후삼국 시기를 거쳐 고려가 통일한 후에도 유지되었다. 더욱이 호족들은 국가의 군사 조직과는 별도로 병부(兵部)와 군직까지 설치했다. 이에 위협을 느꼈던 고려 조정은 지방 호족들의 사병을 지방 제도에 편제시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고려 무신 집권기에 경대승(慶大升)은 자신의 경호를 위해 조직화된 사병 집단인 도방(都房)을 설치했다. 도방은 경대승의 죽음과 함께 해체되었는데, 최충헌(崔忠獻)은 도방의 규모를 더욱 확대해서 재건했다. 하지만 당시의 사병 집단은 무신 정권의 붕괴와 함께 해체되었다.

고려 말에 국가의 군사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사병 집단이 부활하였다. 여러 지역의 장수들에게 군대의 징발과 통수권이 분산되면서 각지의 군사들은 사병처럼 예속되었다. 대표적인 예는 함경도를 근거지로 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그 사병 집단이었다.

조선은 건국 후 사병을 혁파하기 위해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고 군사권의 국가적 통제를 시도했다. 하지만 종친과 훈신(勳臣)들의 사병은 유지되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특히 2차 왕자의 난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이 사병을 혁파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했다. 이 과정을 통해 태종은 국왕과 세자의 시위(侍衛)를 제외한 모든 사병을 혁파했다.

▶ 관련자료

ㆍ사병(私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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