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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제목 위화도 회군
한자명 威化島回軍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무진회군(戊辰回軍)
별칭•이칭

[정의]

요동 정벌 지휘관이었던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禑王, 재위 1374~1388)과 최영(崔瑩, 1316~1388) 등을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했던 사건.

[내용]

고려는 공민왕 재위 시 원(元)보다는 명과의 외교 관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공민왕 다음에 왕위에 올랐던 우왕은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원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로 인해 고려는 명과 외교적 대립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388년(고려 우왕 14) 명은 고려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철령 북쪽의 영토를 요동도사(遼東都司)의 지휘 아래 두겠다고 통보하였다. 고려는 명의 조치를 결코 수용할 수 없었고, 철령위 설치에 대응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결정했다. 요동 정벌의 논의 과정에서 당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며 출병에 강하게 반대했다.

논의 끝에 우왕과 최영 등의 강한 주장으로 요동 정벌의 시행이 결정되었다. 고려는 정벌을 위해 5만여 명이 넘는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왕족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등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정벌군은 압록강 근처까지 행군했을 때 큰 비를 만나 도강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성계는 다시 출병의 취소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하자 결국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했다.

이성계는 개경에서 최영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서 승리했다. 이 전투를 통해 반대 세력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한 이성계는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으로 귀양 보냈고 우왕을 폐위했다.

결국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조선 건국의 핵심이 되었던 신진 세력도 이 사건을 계기로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 세력은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조선 건국을 위한 정치적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 관련자료

ㆍ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ㆍ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