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용어 해설시대별 > 전체

영남학파

제목 영남학파
한자명 嶺南學派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영남 사림파(嶺南士林派), 영남 성리학(嶺南性理學), 영남 성리학파(嶺南性理學派), 주리파(主理派)
별칭•이칭

[정의]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스승으로 삼은 학파.

[내용]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합쳐서 영남이라고 한다. 퇴계 이황을 종장(宗匠)으로 모신 학자들이 주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영남학파라 한다. 반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모신 학자들이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기호학파라고 부른다.

이황이 활동하기 이전에도 영남 지역은 성리학이 심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림파의 거두로 추앙받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1)이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영남 지역에서 다수의 사림(士林)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김종직은 기호 지방과 영남 지역 모두에 중요한 스승으로 거론된다. 김종직의 학문은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 사림파 또는 도학파는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며, 그 시작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에 와서 이루어졌다. 이언적은 김종직 문하의 손중돈에게 배워 사림의 학문적 성과를 계승하였으며, 조선 최초의 성리학 논쟁인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보편적 도덕 법칙인 이(理)를 중시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관점은 다시 이황에게 이어졌다.

이황이 경상북도 안동과 예안(禮安)에서 학문에 정진하였고, 이후 이황을 숭모하는 많은 학자들이 영남 지역에서 배출되면서 퇴계학파가 성립하였다. 또 이황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은 경상남도 합천과 산청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이들은 이황을 따르는 ‘퇴계학파(退溪學派)’와 구분하여 ‘남명학파(南冥學派)’라고 불린다. 퇴계학파는 정파로 보면 남인이며, 남명학파는 북인이다. 남명학파는 타협하지 않는 절개와 실천으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임진왜란 때 남명학파 출신의 의병장이 다수 나왔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시기 집권 세력이었던 북인이 인조반정으로 대부분 소멸되면서, 남명학파는 쇠잔해지고, 퇴계학파가 융성해졌다. 따라서 이후 영남학파는 퇴계학파가 중심이 되었다.

이황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 리(理)가 운동성을 갖고 스스로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성리학에서 리(理)는 무형, 무위의 특성을 가지며 기(氣)의 운동성만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황의 설명에 따르면 리(理)가 발(發)한 것이 사단(四端)이며 기(氣)가 발한 것이 칠정(七情)이다. 이와 달리 이이는 리가 발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단이든 칠정이든 모두 기(氣)가 발하고 리가 이를 조종한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제시하였다.

퇴계학파는 이후 4인의 뛰어난 직전 제자를 중심으로 크게 네 학파로 나누어졌다. 이 중 월천(月川) 조목(趙穆)은 그 문인들이 남명학파와 함께 대부분 북인에 가담하여 인조반정 이후 쇠락하였으므로, 조선 후기까지 영향을 미친 퇴계의 학맥은 세 갈래로 볼 수 있다. 먼저 도덕적 본성으로서 리의 절대성과 능동성을 인정하는 퇴계의 관점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에게 전해져 이휘일, 이현일 형제를 통하여 심화되었으며 이진상, 곽종석 같은 한말의 이학자(理學者)에게 이어졌다.

반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퇴계 학설만을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고 사상에서 다소 차이를 보였으며, 이들로부터 퇴계학파의 여러 분파가 생겨났다. 유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는 예학에 관심을 쏟아 역시 기호학파 중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과 비교되었다. 정구의 문인 중 미수 허목은 기호 지역의 퇴계학파를 성립시켜 이후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성재 허전, 청담 이중환, 금대 이가환,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정구의 제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역시 이이의 학설을 절충하여 퇴계학과 긴밀하면서도 독자적인 여헌학파를 성립시켰다.

[의의]

퇴계를 종장으로 하는 영남학파는 주자학과 다른 조선식 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사고의 유연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학문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두어 후에 많은 실학자를 배출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