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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 정치

제목 세도 정치
한자명 勢道政治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세기 전반 왕권이 허구화되고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정치 형태.

[내용]

‘세도(世道)’란 원래 ‘유교 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이며, ‘세도’를 근심하는 주체는 사대부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박제형(朴齊炯)이 저술한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서는 ‘세도’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0년대 안확(安廓)의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에서 ‘세도(世道)’ 대신 ‘세도(勢道)’라는 용어를 통해 왕권을 능가하는 척신(戚臣)들의 권력을 표현하였다. 이때부터 ‘세도 정치(勢道政治)’는 19세기 조선 정치사의 파행적 행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등장하였다.

본격적인 세도 정치는 정조 사후인 19세기에 시작했다. 영조와 정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800년(순조 즉위) 11살의 나이에 즉위한 순조(純祖, 재위 1800~1834)는 정조에 의해 선택된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이후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순조의 명으로 1827년(순조 27)부터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3년 만인 1830년(순조 30)에 사망하였다. 세자는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으므로 이후 풍양 조씨의 일족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안동 김씨 일파와 세력 투쟁을 벌였고, 8살의 나이에 헌종(憲宗, 재위 1834~1849)이 즉위한 후에는 조만영의 동생 조인영을 중심으로 풍양 조씨가 한때 정권을 장악하였다. 뒤를 이은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은 강화도에 살다가 갑자기 왕위에 올라 국왕이 되기 위한 소양을 갖추기 어려운 상태였으며, 역시 김조순의 집안사람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비로 맞아들여 이후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 정치가 절정에 달하였다. 이처럼 19세기는 역량이 부족한 국왕이 잇따라 즉위하였고, 그 공백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경주 이씨, 동래 정씨 등 세도 가문의 권력 농단으로 채워졌다. 국왕은 형식적으로는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실질적 권한은 미약했다. 세도 정권은 19세기에 벌어지고 있던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 개혁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소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표현되는 사회 모순들은 민란으로 폭발했다.

세도 정치는 특정 개인에 의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 모순이 축적되어 생겨난 것이며, 이는 근대 사회로 가기 전에 나타난 마지막 정치 형태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극복은 개혁의 동력을 잃은 집권층 내부가 아닌 외부, 곧 민(民)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 관련자료

ㆍ세도 가문(勢道家門)
ㆍ세도 정치(勢道政治)
ㆍ세도가(勢道家)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