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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시사

제목 옥계시사
한자명 玉溪詩社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786년(정조 10) 천수경(千壽慶)을 중심으로 인왕산 부근에서 펼쳐졌던 시회(詩會).

[내용]

옥계시사(玉溪詩社)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위항 문학(委巷文學)의 산실이었다. ‘위항(委巷)’이란 꼬불꼬불하고 좁고 지저분한 거리를 뜻하는 말이다. 서울의 양반이 넓은 터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반면 일반 백성들은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어살아서, 양반을 제외한 사람들을 ‘위항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들이 전유한 문학을 위항 문학이라 부른다.

1786년(정조 10) 여름 천수경을 비롯한 13명의 위항 시인들이 옥류동(玉流同) 옥계(玉溪)에 모여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이 중 몇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인왕산 서당에서 글공부를 함께 한 죽마고우였으며, 집도 가까워 자주 만나던 사이였다. 이들은 함께 시를 지으며 평생 벗으로 살자고 맹세하였다.

이들은 주로 인왕산에 사는 동인들의 집에서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지만, 한 달에 한 번은 계절에 맞는 장소를 미리 정하여 시회를 열어 흥취를 더했다. 특히 경치가 좋았던 천수경의 집, 송석원(松石園)이 위항 시인들의 모임 터가 되자 옥계시사의 동인들은 더욱 늘어났다. 송석원의 모임이 성황을 이루어 장안의 위항 시인 수백 명이 1년에 2차례씩 모여 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것을 백전(白戰)이라 불렀다.

1818년(순조 18) 천수경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에 동인들이 송석원의 이야기와 시를 엮어서 『송석원산사(松石園山史)』를 펴냈다. 이때까지가 옥계시사의 전성기이다. 천수경이 세상을 떠나고 옥계시사도 시들해졌다.

[의의]

옥계시사는 사(士) 의식이 일반 민(民)에게 확대되어 가는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서울의 위항인들은 늘어난 교육의 기회를 바탕으로 ‘사(士) 의식’을 키워나가면서 양반 문화를 흡수해 갔고, 그 결과 사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시 문학(詩文學)은 위항의 민에게까지 확대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