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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제목 홍경래의 난
한자명 洪景來의亂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관서 농민 전쟁(關西農民戰爭), 관서 농민 항쟁(關西農民抗爭), 서북 농민 항쟁(西北農民抗爭), 평안도 농민 전쟁(平安道農民戰爭), 홍경래난(洪景來亂)
별칭•이칭

[정의]

1811년(순조 11) 평안도 지역에서 홍경래(洪景來, 1771~1812)가 주도하여 일으킨 반란.

[내용]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 농민들의 저항 의식 성장과 서북 지역의 특성이 결합하면서 일어난 농민 항쟁이었다. 조선 후기는 상업의 발달과 교육 기회 증가 등에 따라 지식인 계층이 확대되고, 이를 토대로 과거에 응시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졌지만 이전의 관직 체계로는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서 불만 세력은 갈수록 늘어갔다. 특히 평안도는 성리학적 기풍이 강하지 않았기에 사회 질서와 문화가 낙후되었다. 또한 군사 전략 지역이자 사신 접대 지역이라는 특수성 등으로 독자적인 재정 운영을 하면서 재정적인 부담도 가중되었기에 지역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홍경래는 풍수가로 활동했던 우군칙(禹君則), 진사 김창시(金昌始) 등과 반란을 모의하여 1811년(순조 11) 12월 18일 흉년으로 흉흉해진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의 난은 홍경래가 총지휘를 맡고, 무사층(武士層)에서 군사를 지휘하고, 대상인(大商人)들의 후원을 받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홍경래를 중심으로 한 반란의 주역들은 다양한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사회경제적 처지는 농민과 다를 바 없었고, 의식과 행동 면에서 농민들과 강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홍경래의 난은 빈민층까지 자발적으로 반란에 참여함으로써 대규모 민란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봉기 초기 청천강 이북 8개 지역을 단숨에 장악하였으나 의견 대립 등으로 점차 수세에 몰리면서 반란군은 정주성(定州城)으로 퇴각하였다. 1812년(순조 12) 4월 19일 정부군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정주성에서 벌인 농민들의 치열한 투쟁은 농민 일반의 주체적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었지만 이후 농민 항쟁에 많은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 관련자료

ㆍ홍경래 난(洪景來亂)
ㆍ홍경래(洪景來)
ㆍ홍경래의 난(洪景來의亂)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