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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제목 우금치 전투
한자명 牛金峙戰鬪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894년 11월 충청도 공주의 우금치에서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 및 관군과 치른 전투.

[내용]

1894년 7월에 청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자, 전주 화약 이후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 개혁을 추진하던 동학 농민군은 1894년 9월에 일본군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 재봉기를 단행했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지세가 넓고 교통의 요지인 삼례에 대도소(大都所)를 정하고 농민군의 결집을 추진했다. 삼례에 집결한 4만여 명의 농민군은 총대장 전봉준과 손화중(孫華仲, 1861~1895), 김덕명 등의 지휘를 받으면서 논산으로 북상해 갔다. 한편 화평론을 주장했던 북접의 최시형(崔時亨, 1827~1898)도 반외세라는 명분을 받아들여 무력 투쟁을 지시함으로써,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이끄는 북접의 농민군은 10월 9일에 강경에서 남접의 농민군과 합류하였다.

한편 동학 농민군이 재봉기하자마자 조선 정부는 일본군과 협력하여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결정하였다. 9월 21일 통위영(統衛營)과 장위영(壯衛營) 소속 부대가 주력이 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설치하고, 호위부장 신정희를 도순무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일본은 서울에 주둔해 있던 제18대대 일부를 전라도로 파견하는 한편, 제19대대를 중심으로 오로지 농민군 섬멸을 목적으로 하는 부대를 농민군이 봉기한 지역으로 파견함과 동시에 조선 정부로부터 조선군의 지휘권을 확보하였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관군의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봉준이 10월 20일에 공주로 총공세를 명령하자, 농민군은 10월 23일 이인을 시작으로, 24일 대교, 25일 효포, 능치 등지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공방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농민군은 관군 및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과 지세의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시 후퇴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김개남의 병력 지원을 받아서 전열을 정비한 후 11월 8~9일에 공주 우금치에 집결해서 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했다. 이를 우금치 전투라고 일컫는다.

11월 8일 농민군이 이인, 무넘이 고개를 공격하자, 관군은 농민군에 쫓겨서 공주성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농민군은 11월 9일 아침부터 3면(효포, 웅치, 우금치)으로 공주를 포위하고, 공주 진입의 요지인 우금치를 향해서 진격을 개시했다. 당시 우금치에는 이규태(李圭泰)와 이두황(李斗璜)이 이끄는 관군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우금치의 최고봉인 견준봉에는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다. 그 밖에 일본군의 훈련을 받은 이진호(李軫鎬, 1867~1943)가 이끄는 교도중대(敎導中隊)와 성하영(成夏泳)이 이끄는 경리청(經理廳) 군사들이 방어선 일대에 배치되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농민군 주력 대부분이 우금치의 좁은 골짜기로 공격해 오자 우세한 지형을 활용해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관군 측 기록에 의하면 농민군은 총 4, 50여 차례에 걸쳐서 우금치를 돌파하고자 했지만, 불리한 지형과 관군 및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해야만 했다. 한편 농민군 일부는 우금치 계곡을 우회에서 두리봉을 점령하고 공주로 진격하였지만, 본대가 우금치에서 패배하고 관군 및 일본군이 퇴로를 차단함에 따라 이 작전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를 당한 채 논산 방면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전봉준은 후퇴를 하면서 관군에게 격문을 띄워서 조선 사람끼리 싸우지 말고 함께 일본군을 무찌르자고 호소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우금치 전투의 참패로 농민군의 서울 북상은 좌절되었으며, 동학 농민군 봉기도 실패하게 된다.

▶ 관련자료

ㆍ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패하고
ㆍ우금치 전투(牛金峙戰鬪)
ㆍ우금치(峙戰鬪)
ㆍ동학 농민 운동(東學 農民 運動)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