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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개혁

제목 을미개혁
한자명 乙未改革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제3차 갑오개혁(第三次甲午改革), 제3차 갑오경장(第三次甲午更張)
별칭•이칭

[정의]

1895년부터 1896년 초까지 조선 정부가 시행한 개혁의 총칭.

[내용]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된 갑오개혁은 개혁 담당 세력의 변동 및 역사적 사건에 의해 몇 단계로 구분된다. 1895년 4월 이루어진 삼국 간섭 등으로 인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되자, 이를 우려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10월 8일)을 일으키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일련의 개혁을 일반적으로 을미개혁 또는 제3차 갑오개혁이라 부른다.

을미개혁은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1842~1896),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 1848∼1896), 내부협판 유길준(兪吉濬, 1856~1914), 법부협판 장박(張博, 1849~1921)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 관료층은 개혁이 국왕 중심으로 추진되는 것을 견제하고자 일본의 간섭을 받아들이고, 을미사변에 대한 처리를 최대한 신속하고 조용하게 마무리했다. 이들은 강력한 서구식 개혁 정책을 시행하였다.

을미개혁의 주요 정책은 태양력 사용, 개국 연호 건양(建陽) 사용, 국왕과 왕실의 권한을 축소하는 궁내부관제(宮內府官制) 개정, 향회조규(鄕會條規)와 향약판무규정(鄕約辦務規程)의 발포를 통한 지방 자치 실시 계획, 지방 징세 기구 정비, 군대와 경찰 조직의 재편, 소학교 교육의 실시, 우체사(郵遞社) 설치, 종두법 시행 등이었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로 반일 감정이 팽배해 있던 국민들에게 서양식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라는 단발령은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관군과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일본과 친일 관료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1896년 2월 11일 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고, 결국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면서 을미개혁은 종료되었다. 을미개혁은 국가 체제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여러 개혁적인 조치를 시행했으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한 비주체적인 개혁이었고 또 국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서 실패하였다.

▶ 관련자료

ㆍ을미개혁(乙未改革)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