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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방 청원 운동

제목 합방 청원 운동
한자명 合邦請願運動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일본
유의어 정합방청원(政合邦請願)
별칭•이칭

[정의]

1909년 12월 일진회가 한국과 일본의 ‘합방’을 청원한 이후 친일 세력에 의해 전개된 운동.

[내용]

1909년 3월 일본 외무성은,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작성하여 내각 수상에게 제출하였다. 7월 일본 내각 각료회의는 「한국 병합의 건」을 통과시켰고, 일왕의 재가도 받았다. 이렇게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준비가 진행되는 가운데 10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941~1909)는 한국 강제 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하얼빈에 갔다가 안중근 의거로 사살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반한 감정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한일 강제 ‘병합’을 주장하는 조선문제동지회의 활동도 시작되었다. 이런 가운데 일진회는 ‘병합’이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합방’을 청원함으로써 그 공로를 인정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합방 청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진회는 12월 4일 순종과 내각, 통감부에 합방청원서를 제출하고, 5일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합방 청원 운동을 공식화하였다. 그들은 외교, 군사, 재정을 공동으로 하는 대신 각각 자치권을 확보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병합’ 형태를 모델로 ‘합방’을 주장하였다. 일진회의 청원서가 제출된 이후 일진회의 기관지였던 〈국민신보〉에는 ‘합방’을 지지하는 유생층의 상소가 게재되었다. 〈황성신문〉, 〈대한민보〉, 〈대한매일신보〉 등은 일진회의 ‘합방’ 주장을 맹비난하면서 그들을 매국적(賣國賊)으로 규탄했다.

1909년 12월부터 1910년 2월까지 일진회의 청원 운동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1910년 2월 2일 일본 총리대신 카츠라 타로(桂太郞)가 일진회와 유생들의 합방 의견서를 수리하고, 합방 반대 의견서는 모두 기각한다는 방침을 하달함에 따라 논쟁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이 운동으로 일진회에 대한 대한제국의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고, 일진회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소멸되기 시작했다. 한편 통감부는 일진회의 청원 운동에 대한 대한제국민의 여론 동향을 탐문하여 강제 병합 실행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 관련자료

ㆍ합방 청원(合邦請願)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