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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보

제목 한성주보
한자명 漢城週報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조선,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886년(고종 23) 1월 창간된 최초의 주간 신문.

[내용]

박문국(博文局)에서 발행하던 〈한성순보(漢城旬報)〉가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실패 후 박문국의 건물과 인쇄 시설이 파괴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다. 1885년 5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건의에 따라 박문국이 다시 설치되면서 신문 발행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이때 갑신정변 당시 일본으로 도망쳤던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가 함께 들어와 폐간된 〈한성순보〉의 복간을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에게 건의하였다. 그는 개화와 민중의 계몽 및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신문이 다시 복간되어야 하며 표기는 한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문 발간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던 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김윤식(金允植)의 도움으로 고종의 윤허를 얻어낸 이노우에는 일본에서 신문 발간에 필요한 기계와 활자를 들여와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漢城週報)〉를 창간하였다. 하지만 신문은 박문국의 재정적 지원하에 발간되었다. 당시 박문국의 총재는 김윤식, 부총재는 정헌시(鄭憲時), 주필 장박(張博), 회계주임 정병하(鄭秉夏) 등이었다.

〈한성주보〉는 4호 활자로 세로 22.5㎝, 가로 16.5㎝ 크기의 국한문 혼용 신문이었다. 〈한성주보〉는 〈한성순보〉와는 별개로 발행 호수를 이어받지 않고 창간호로 시작되었다. 구성은 논설과 시사 해설에 해당하는 사의란(私議欄), 외보(外報), 집록(集錄), 공고란(公告欄) 등으로 이루어졌다. 〈한성순보〉는 순 한문을 사용하였지만, 〈한성주보〉는 국내 기사는 국한문이 주로 사용되었고, 사의와 집록은 순 한문이며, 외보와 지략(地略)은 주로 순 한글로 게재되었다. 당시 실무를 담당하였던 사람은 강위(姜瑋)였다. 강위는 이전부터 이노우에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상해신문(上海新聞)〉과 〈지지신보(時事新報)〉를 함께 번역하는 등 한글 사용에 적극적이었다. 위와 같이 〈한성주보〉에 한글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도 강위의 공이 컸다. 또 〈한성주보〉에서는 날짜도 중국 연호와 함께 조선 개국 연도와 서기 연도를 병기하였는데, 신문의 주된 논조는 문명개화와 민중 계몽, 그리고 충군애국이었다.

〈한성주보〉는 1888년 7월 14일 박문국이 재정 부족으로 폐지되면서 함께 폐간되었다. 이것으로 국가에서 발행하던 신문은 사라지고, 1896년 〈독립신문〉이 발행될 때까지 국내에는 한국인이 발행한 신문은 없게 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