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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대

제목 훈련대
한자명 訓鍊隊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조선,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갑오개혁 시기 일본의 건의로 창설된 군대.

[내용]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여 친일 정권을 세운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일본식 군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당시 군제 개혁의 목표는 훈련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근대적 군사 조직을 설치함과 동시에 기존 군 조직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1894년 12월 22일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을 알현한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기존 병정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훈련대를 조직하여 근위병에 충당할 것, 군부 고문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를 초청하여 군사상 자문을 받을 것, 훈련대 연습을 참관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895년 1월 18일 옛 군영의 병정 가운데 일부를 선발하여 훈련대를 편성하였다. 처음에는 중앙에 2개 대대가 편성되었고, 이어서 평양에 제3대대, 청주에 제4대대(이후에 전주로 이전)가 설치되었다. 7월에는 제1대대와 제2대대를 합하여 1개 연대로 편성하였는데 연대의 총 인원은 1,773명이었다.

당시 궁궐을 호위하던 부대는 미국인 군사 교관이 주도하던 시위대로 고종이 상당히 신뢰하고 있었다. 한편, 총리대신 겸 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정국의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궁궐 호위병을 훈련대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훈련대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고종이 크게 반발하면서, 호위병 교체 논의는 일단 중단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1895년 윤5월 15일 ‘국왕과 왕비에게 호위병 교체를 강제하여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박영효에게 체포령이 내려졌고, 결국 그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에도 시위대와 친일적인 훈련대 간에 궁궐 호위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었다. 8월 20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훈련대는 시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당시 명성황후 시해에 따른 비난을 받고 있던 김홍집 정권과 일본은 비난을 피하고,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9월 13일 훈련대를 해산시켰다. 해산 이후 서울에 있던 훈련대 1연대는 친위대(親衛隊)로, 지방에 있던 제3대대와 제4대대는 진위대(鎭衛隊)로 개편되었다.

▶ 관련자료

ㆍ훈련대(訓鍊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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