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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형령

제목 조선 태형령
한자명 朝鮮笞刑令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태형(笞刑), 태형령(笞刑令)
별칭•이칭

[정의]

1910년대 무단 통치 상징 중의 하나로 공식적인 형벌 제도 안에서 한국인에게 태형(笞刑)을 가할 수 있도록 한 법률.

[내용]

「조선 태형령」은 1910년대 식민 통치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법률로 1912년 3월 15일 일본 내각 각의를 통과하고, 18일 「조선 형사령」, 「조선 감옥령」 등 다른 식민지 형사법규들과 함께 공포되었다. 그리고 3월 19일 「조선 태형령 시행 규칙」과 3월 30일 「태형 집행심득」이 공포되면서 「조선 태형령」에 대한 법규 정비가 완료되었다.

사람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신체형은 전근대 시기에 보편적인 형벌 중의 하나였다. 조선 시대의 신체형을 일반적으로 태장형(笞杖刑)이라고 불렀는데,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을 합친 표현이었다. 태와 장은 대개 물푸레나무로 만든 형벌 도구로 장이 굵은 막대기에 가까웠다면 태는 회초리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와 같은 신체형은 근대적 형벌 제도의 도입과 함께 사라지고, 자유형재산형 등으로 형벌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일반적인 형벌 제도의 변화였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의 현실에서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태형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형벌로 태형을 존속시켰다. 일제가 태형을 유지한 이유는 태형이 재산형이나 자유형보다 징벌의 효과가 컸고, 감옥 등 추가적인 시설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행이 용이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즉, 한국인을 지배하기 위한 방편으로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여 주는 태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전근대적인 형벌 제도인 「조선 태형령」은 1919년에 발생한 3⋅1 운동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폐지되었다. 3⋅1 운동의 폭발성에 당황한 일제는 무단 통치의 억압성과 야만성에 분노한 한국인을 달래기 위한 시도 중 하나로 태형 제도의 폐지를 추진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1919년 10월 16일 「조선 태형령」 폐지안을 일본 내각에 보냈고, 이듬해 3월 24일 일본 내각은 1920년 4월 1일부로 「조선 태형령」을 폐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태형 제도의 폐지는 기만적이기는 하나 무단 통치에서 일정한 자유를 허용한 1920년대 ‘문화 정치’로의 전환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그만큼 태형 제도가 한국인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 관련자료

ㆍ조선 태형령 시행 규칙(朝鮮笞刑令施行規則)
ㆍ조선 태형령(朝鮮笞刑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