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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학교

제목 명동 학교
한자명 明東學敎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08년 김약연(金躍淵, 1868~1942) 등이 북간도 한인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민족 교육 기관.

[내용]

1908년 4월 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명동 서숙(明東書塾)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교하였다. 명동촌은 용정(龍井)의 남쪽 화룡현 지신향 장재촌(長財村)에 위치한 조선인 마을로서 규암(圭巖) 김약연을 비롯하여 김하규, 문치정, 남위언 등이 가솔들을 이끌고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건설하였다. 명동촌을 개척한 이후, 민족 교육 기관의 필요성에 따라 명동 서숙을 세우고 박무림(朴茂林)이 숙장(塾長), 김약연이 숙감(塾監), 문치정이 재무를 담당하였다.

1909년 북간도 교육단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면서 기독교 학교로 개편하고, 명칭도 명동 학교로 개칭하였다. 북간도 교육단 단장이었던 정재면(鄭載冕, 1882~1962)은 서울 상동교회 부설 기독 청년 학원을 졸업하고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간도로 왔다. 이후 명동 학교의 교무주임으로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교육 이념으로 하는 교육 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이를 위해 국내로부터 역사에 황의돈, 윤리에 박태항, 한글에 장지영, 체육에 김홍일 등을 초빙하여 명동 학교의 쇄신을 이끌었다.

학교가 변화함에 따라 간도 일대뿐만 아니라 국내와 연해주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1910년 중학부가 증설되었고 1911년에는 북간도에서 처음으로 여학부가 신설되었다. 당시의 학생 수는 중학부 160명, 소학부 280명, 여학부 65명 등 총 505명에 이르렀다. 소학부에서는 국어, 동국역사, 성경, 교육학, 창가, 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명동 학교 출신들은 1919년 3⋅1 운동 때 용정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인 3⋅13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여러 민족주의 교육 기관의 교사가 되거나 독립군으로 참여하는 등 간도 지역, 나아가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윤동주, 나운규, 문익환 등도 명동 학교에서 공부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