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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당

제목 한인사회당
한자명 韓人社會黨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러시아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8년 이동휘(李東輝, 1873~1935)를 중심으로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내용]

1910년대 후반 러시아 극동 지역에는 이미 십수만 명의 한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려는 시도가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12월 볼셰비키 극동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었다. 극동 소비에트 정부는 백위군(白衛軍)과 치열한 시베리아 내전을 전개하는 가운데 한국인들을 소비에트 정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였고, 한국 독립운동가들도 독립운동에 소련의 도움을 얻기 위해 협력하였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러시아력으로 1918년 4월 18일 극동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 속에 한인사회당이 창립되었다. 위원장에는 이동휘가, 선전부장에는 김립(金立)이, 군사부장에는 유동열(柳東說)이 선임되었고, 김알렉산드라, 박진순(朴鎭淳) 등도 중앙위원을 맡았다. 한인사회당은 근거지를 러시아 극동 소비에트 정부가 있는 하바롭스크에 두고, 연해주와 아무르 주 일대에 8개의 당 지부를 설치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기본적으로는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 및 출판 활동을 담당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로 한글 잡지 『자유종(自由鐘)』을 발간했으며, 한글로 된 마르크스주의 서적 간행도 추진하였다. 『자유종』의 주필은 계봉우(桂奉瑀)가 맡았다. 그리고 교육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하바롭스크에 문덕 중학교(文德中學校)를 설립하고 러시아 한인들의 교육을 지원하였다. 단순한 교육 사업만이 아니라 무장 부대를 위한 인력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동열을 책임자로 하바롭스크에 사관 학교를 운영하였으며, 남만주의 독립군 사관 학교 학생들 및 홍범도가 이끌던 무장 부대 등과 결합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18년 8월 일본과 미국의 반(反)소비에트 연합군이 극동 지역에 상륙하여 시베리아 내전에 본격 개입하였다. 이들의 지원을 받은 백위군이 9월 하바롭스크를 함락시키면서 극동 소비에트 정부가 붕괴되었다. 때문에 이들의 후원하에 활동하던 한인사회당도 더 이상 이 지역에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한인사회당의 중요 인물이던 김알렉산드라는 하바롭스크를 탈출하다 백위파에 붙잡혀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후 살아남은 한인사회당 출신 인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김규면 중심의 민족주의 단체인 신민당을 흡수하고 1919년 4월 제2차 당 대회를 열어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이때 코민테른에 박진순 등 대표 3명을 파견하였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이동휘는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로, 김립은 국무원 비서장으로 취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여 한인들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4월 참변), 한인사회당은 다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소련 볼셰비키군이 장악한 아무르 지역을 거쳐 러시아 극동 소비에트공화국의 치타로 이동하였다. 이후 상하이로 근거지를 옮겨 김철수, 주종건 등의 사회혁명당과 결합하여 1921년 5월 상해파 고려 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당시 코민테른은 한인사회당에서 파견한 김립과 박진순에게 40만 루블을 지원하였는데, 1920년 12월 상하이에 도착한 김립이 이를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 출신 인물들의 활동 자금으로 써서 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