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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제목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한자명 大韓民國臨時議政院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입법 기관.

[내용]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을 수립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독립운동가 29명이 상하이에 집결하여 먼저 입법 기구인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였다. 의장은 이동녕(李東寧, 1869~1940), 부의장은 손정도(孫貞道), 서기는 이광수(李光洙), 백남칠(白南七)이었다.

임시 의정원 제1회 회의에서는 임시 정부 설립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새로운 국가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 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을 제정 공포하였다. 헌장 제2조에는 “대한민국은 임시 정부가 임시 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이라고 하여 임시 의정원과 임시 정부가 입법부와 행정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1919년 4월 25일 열린 제3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임시 의정원법’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임시 의정원을 운영하였다. 임시 의정원법에는 “의정원은 각 지방 인민의 대표의원으로 조직”한다고 하여 국민의 대표임을 명시하였다. 의원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중등 교육을 받은 만 23세 이상의 남녀 중에서 선출하도록 하였다. 인구 30만 명당 의원 1명을 원칙으로 하되, 경기도 6명, 충청도 6명, 경상도 6명, 전라도 6명, 강원도 3명, 함경도 6명, 황해도 3명, 평안도 6명, 중국령 교민 6명, 러시아령 교민 6명, 미국령 교민 3명 등 총 57명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선출이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의원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임시 의정원은 1919년 4월 10일 제1회 회의를 개최한 이래 1945년 8월 22일까지 총 39회의 회의를 개최하며, 입법부로서의 역할을 26년 동안 수행하였다. 임시 의정원이 비록 국외에 세워졌지만, 근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권력 분립의 이념적 토대 위에 실질적인 의회 정치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 때문에 광복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국회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을 계승한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 관련자료

ㆍ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