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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 군정서

제목 북로 군정서
한자명 北路軍政署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9년 북간도에서 결성되었고, 청산리 대첩에서 크게 활동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

[내용]

1911년 서일(徐一, 1881~1921), 계화(桂和), 채오(蔡五), 양현(梁玄) 등이 대종교 교리를 통한 항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열기가 북간도에까지 전해지자, 중광단은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다른 독립운동 세력과 합작하여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설립하였다. 대한정의단의 단장은 서일이었으며, 기관지 〈일민보(一民報)〉, 〈신국보(新國報)〉 등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19년 8월 이후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무장 독립 투쟁을 본격화하자, 대한정의단에서도 무장 투쟁을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한 정의단은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조성환(曺成煥), 박찬익(朴贊翊) 등이 활동하고 있는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결합하여 1919년 10월 대한 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총재는 서일, 사령관은 김좌진이 맡았다.

그러나 당시 이미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부’라는 명칭이 문제가 되었다. 1919년 12월, 대한 군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위를 인정하고 임시 정부 산하의 군사 기관으로서 공인을 요청하였다. 임시 정부는 ‘군정부’라는 명칭을 ‘군정서’로 개칭하는 조건으로 이를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 군정부는 대한 군정서(大韓軍政署)로 공식 명칭을 변경하였다. 당시 서간도 지역에 ‘서로 군정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별을 위해 북로 군정서로 불리게 되었다.

북로 군정서는 중앙 조직과 지방 조직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중앙 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재부의 주요 간부는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인사국장 정신 등이었고, 주로 관내의 사무를 통괄하였다. 사령부는 군사 활동을 담당하였고, 총사령관은 김좌진이 맡았다. 주된 활동은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과 무장 활동이었다. 총재부의 재무부 산하에 모연국, 탁지국, 경리국 등을 두어 군자금을 모금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무기는 주로 노령(露領)을 통해 구입하였다. 또한 독립군을 지휘할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1920년 2월 왕청현 서대파에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였다. 교장은 김좌진이 맡았고 생도들은 6개월 동안 사관 교육을 받았다. 1920년 9월 9일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거행되어 298명의 사관이 배출되었다. 일반 병사들은 징모국을 통하여 모집되었다. 북간도 현지와 국내 혹은 러시아 지역에서 장정들을 모집하였다. 설립 후 불과 1년 만인 1920년 10월경에는 간부와 병사를 합하여 약 1,600여 명의 인원을 거느린 유력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로 발전하였다.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1920년 9월 12일과 10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마적단이 훈춘(琿春) 시가를 습격하는 훈춘 사건을 조작하였고, 이를 빌미로 대규모의 정규군을 간도로 출병시켰다. 일본군이 간도로 들어오기 전부터 독립군들은 근거지를 떠나 겨울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북로 군정서는 주력 부대를 백두산록의 이도구(二道構) 방향으로 이동시켰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가 이끄는 부대도 이 지역으로 이동해 있었다. 10월 21일 백운평 부근에서 아즈마(東)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를 만나 싸웠다. 독립군 부대들은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청산리 일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했다. 이 중 백운평, 천수평, 맹개골, 만기구 전투는 북로 군정서가 단독으로 수행하여 승리하였고, 어랑촌, 천보산 전투는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수행하였다. 이 전투를 청산리 대첩이라 하며, 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하여 1,200여 명이 사살되었고 독립군 측의 피해는 미미했다.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한 북로 군정서는 여타의 독립군들과 연합하여 통합 부대를 결성하기 위하여 밀산(密山)으로 향했다. 밀산에서 북로 군정서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이 연합하여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였는데, 서일이 총재에 취임했다. 1921년 들어 독립군 부대들은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며 아무르 주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김좌진 등 일부 북로 군정서 대원은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시 북만주로 회군하였지만, 서일 등 다른 북로 군정서 대원들은 자유시에 남았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면서 독립군 부대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만주로 돌아온 김좌진 등은 흩어진 부대들을 모아 1922년 8월 대한 독립군단을 재건하였지만, 이전과 같은 대규모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지는 못했다.

▶ 관련자료

ㆍ대한 군정서(大韓軍政署)
ㆍ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
ㆍ북로 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