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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유일당 운동

제목 민족 유일당 운동
한자명 民族唯一黨運動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20년대 후반에 전개된 좌우 세력을 망라한 민족 단일 정당 건설 운동.

[내용]

민족 유일당 운동은 1920년대 후반에 국내외 독립운동의 모든 세력을 규합하여 통일된 정당을 조직하자는 운동이었다. 넓은 의미로는 중국 관내에서 추진된 민족 유일당 운동과 만주의 3부 통합 운동, 그리고 국내의 신간회 결성 같은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을 아우르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중국 관내와 만주 지역에서 진행된 국외의 민족 유일당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중국 관내의 민족 유일당 운동은 중국 국민당(國民黨)과 공산당(共産黨)의 제1차 국공 합작(國共合作)을 기반으로 소련의 지원하에 1926년 7월부터 시작된 중국 통일을 위한 국민정부의 북벌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이는 국공 합작 하의 중국 국민정부의 북벌이 군벌 정부와 열강의 간섭을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하면, 일본의 대륙 침략이 좌절되면서 동북아 정세가 크게 변화할 것이고, 한국 독립의 기회가 새롭게 열릴 것으로 전망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비롯해서 당시 국외 민족 운동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북벌이 개시된 같은 달 7월, 상해에서 “주의 여하를 불문하고 단합된 통일전선을 결성”하자며 ‘민족대당(民族大黨)’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 후 안창호는 북경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 원세훈(元世勳)과 만나 민족 유일당을 건설하기 위하여 먼저 각 지역에서 촉성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1926년 10월 대독립당 북경 촉성회를 시작으로, 1927년에는 상해, 광동, 무한, 남경에도 민족 유일당을 위한 촉성회가 조직되었다. 1927년 11월에는 중국 관내 각 지역의 촉성회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서 ‘한국 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를 개최하였다. 촉성회 대표들은 “유일 독립당 성립을 촉성함으로써 한국 독립에 필요한 전 민족적 일체 혁명 역량을 총 집중하는 데 선구가 될 것”을 선언하며 좀 더 발전적 형태인 ‘유일 독립당 주비회(唯一獨立黨籌備會)’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1928년에 들어서면서 민족 유일당 운동은 정체 상태에 놓이게 된다. 민족 유일당 운동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던 중국 국민정부의 북벌이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상해 쿠데타와 뒤이은 국공 분열에 따라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1차 국공 합작이 1927년 7월에 깨지면서 진로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국공 대립은 공산당이 남창 봉기, 추수 봉기 등 무장 투쟁을 전개하면서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한국 독립운동 내부에서도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간에 분열과 대립도 심화되었다. 결국 1929년 11월 민족 유일당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온 상해 촉성회가 해체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중국 관내의 민족 유일당 운동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중국 관내의 민족 유일당 운동은 만주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만주 지역에는 군사 조직이자 자치 조직인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가 결성되어 한인 사회 자치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27년 1월 안창호(安昌浩)는 만주 길림을 방문하여 3부 통합 및 민족 유일당 촉성회 결성을 촉구하였다. 이를 전후해서 정의부와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에서도 민족 유일당 결성을 제기하였다. 1927년 4월 민족 유일당 조직을 위한 일부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표자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합의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일부 참여자들은 시사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8월 정의부는 중앙총회를 열어 민족 유일당 운동을 위해 만주 지역의 3부를 통합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시사연구회는 만주 지역 민족 유일당 촉성회 결성을 위한 회의 개최를 위해 만주 32개 단체에 서한을 보냈고, 1928년 5월에 정의부를 비롯하여 18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서 재만 민족 유일당 결성 문제를 논의하였다. 회의에서는 민족 유일당 건설에는 모두 합의하였으나, 그 건설 방법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로 입장이 나뉘었다. 신민부 민정파, 정의부 다수파, 참의부 일부, 그리고 공산 계열의 화요파는 기존 단체를 중심으로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자고 주장했다.(재만 운동 단체 협의회 : 협의회파), 신민부 군정파, 정의부 소수파, 참의부 주류파, 공산 계열의 ML파는 기존 단체를 해체하고 개인을 중심으로 조직하자고 주장했다.(민족 유일당 촉성회 : 촉성회파)

이러한 대립이 전개되는 가운데, 1928년 9월, 정의부 주관으로 3부 통합 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회의에서 민족 유일당 건설 방법을 둘러싼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신민부 내 민정파와 군정파의 분열이 심화되고, 참의부 대표의 소환 문제로 더욱 갈등이 고조되면서 결국 3부 통합 논의는 11월 들어 결렬되었다. 그 후 촉성회를 통한 유일당 운동을 주장했던 신민부 군정파와 참의부 주류파, 정의부 탈퇴파는 기존 단체들의 해산을 주장하며 1928년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 민족 유일당 재만 책진회)를 결성하였다. 그러자 기존 단체의 연합을 주장하던 협의회파의 신민부 민정파, 정의부 다수파, 참의부 잔존파는 1929년 1월 민족 유일당 조직 동맹을 결성하였고, 4월에는 자치 기관으로서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주의 민족 유일당 운동은 혁신의회와 국민부 두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국민부의 민족 유일당 조직 동맹은 1929년 12월 조선 혁명당으로 개편되었으며, 군사 조직으로 조선 혁명군을 창설하였다. 혁신의회는 1929년 5월 혁신의회의 주요 간부가 체포되면서 조직이 위기에 처하기도 하는데, 이후 1930년 7월 한족 자치 연합회와 한국 독립당(상해의 한국 독립당과 같은 명칭) 결성으로 이어졌다.

▶ 관련자료

ㆍ민족 유일당(民族唯一黨)
ㆍ유일당(唯一黨)
ㆍ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