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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제목 개벽
한자명 開闢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일제 강점기 천도교가 발행한 대표적인 대중 종합 잡지.

[내용]

『개벽』은 1920년대 6월부터 1926년 8월(통권 72호)까지 6년간 매호 8,000-9,000부를 발행하였고, 평균 7,000부 이상의 판매량을 자랑하던 1920년대 전반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였다. 발행 금지 처분으로 1926년에 강제로 폐간되었던 『개벽』은 1934년 11월에 속간호가 발간되었지만, 4개월 만인 1935년 3월호(통권 4호)를 끝으로 더 이상 발간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인 1946년 1월에 다시 『개벽』의 복간이 이루어졌지만, 역시 제대로 발행되지 못하고 1949년 3월호(통권 9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개벽』의 창간은 천도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천도교 청년회의 이돈화(李敦化, 1884~?)를 중심으로 방정환, 김기전, 박달성, 조기간, 차상찬, 이두성, 박래홍, 김옥빈, 박사직 등이 개벽의 창간을 위해 모였지만, 잡지의 발행을 위해 설립한 출판사인 개벽사(開闢社)에는 이들 중 일부만이 참여하였다. 『개벽』 창간호의 발간 당시 개벽사의 정식 사원은 사장 최종정, 편집인 이돈화, 발행인 이두성(李斗星), 인쇄인 민영순(閔泳純)을 비롯하여 강인택, 김기전, 노수현, 박달성, 박용희, 방정환, 현희운 등이었다. 개벽사의 핵심 간부들은 모두 천도교 청년회 간부들이었다.

1920년대까지 천도교는 일제 시기 대표적 종교이자 민족 운동 세력 중의 하나였다. 초창기 『개벽』에 실린 다수의 글도 천도교 청년회 간부이자 개벽사의 직원인 이돈화, 박달성, 김기전 등이 집필하였다. 그러나 『개벽』의 기사 중에서 천도교의 교리에 관한 것은 매우 드물었다. 개벽은 각종 주제에 관한 논설과 문학과 잡문 등이 실린 대중 종합지였다. 그리고 『개벽』의 필자들도 점차적으로 다양화되면서, 다양한 주제들이 『개벽』에 실렸다. 이에 더하여 대중 종합 잡지를 위한 『개벽』의 노력은 대중들과의 소통 가능한 형태의 다양한 기획으로 구현되었다. 독자투고나 지방통신란의 신설, 조선 10대 위인 투표, 전래 동화 모집, 일종의 답사 보고서인 조선 13도호의 발간 등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들이 모여서 『개벽』에 대한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필자들이 논설과 만평을 통해 쏟아내는 현실 비판은 대중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고, 이는 『개벽』의 인기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로 논설은 1920년대 발간된 『개벽』의 전체 기사에서 문학과 잡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논설의 내용은 대부분 사상 및 정치⋅시사에 관한 것으로 식민지 현실의 다양한 문제가 논설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이처럼 개벽은 현실 개혁 혹은 민족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개벽의 전체적인 경향은 1923~1924년을 기준으로 구분될 수 있다. 앞 시기에는 ‘개조론’ 혹은 ‘문화주의’와 관련한 내용이 많았다면, 이후에는 ‘계급주의’와 같은 사회주의와 관련한 글이 많이 소개되었다.

내용적으로 『개벽』은 창간 초기부터 문예란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1920년대 발간된 『개벽』에서 문예란의 평균 비중은 약 33%이었으며, 1930년대의 『개벽』 속간호도 약 36%로 비슷한 비중을 문예란에 할애하였다. 한국 문학사에서 개벽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일례로 김기진, 나도향, 박종화, 염상섭, 이기영, 현진건 등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다수의 작가들이 개벽의 문예란을 통해 등단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전통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개벽』은 한국 문학사에서 기존의 낭만주의 및 자연주의 경향의 문학 활동을 비판하며 형성된 ‘신경향파 문학’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였다. 김기진의 「붉은 쥐」(1924년 11월호), 박영희의 「전투」(1925년 1월호), 「사냥개」(1925년 4월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년 6월호) 등 다수의 신경향파의 작품이 『개벽』에 실렸다.

현실 비판을 수반하는 기사들이 많이 실렸던 만큼 『개벽』은 발행되는 내내 검열에 시달렸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개벽』에 대한 검열은 창간호부터 시작되었다. 『개벽』 창간호의 표지에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것과 더불어 「금쌀악 옥가루」 등의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되어 일제 당국에 압수되었다. 문제가 된 표지와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를 냈지만 이것마저도 압수를 당하였다. 결국 『개벽』은 창간호를 다시 임시호로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창간호를 발행했지만, 검열 문제는 『개벽』 주체들이 “삼개월마다 반드시 한번씩 당한 일이라 새삼스럽게 놀라는 바도 아니”라고 할 정도로 『개벽』의 발행 기간 내내 따라다녔다. 1926년 8월 1일 통권 72호로 폐간되기까지 압수 및 발매 금지 37회 이상, 정간 1회, 벌금 1회의 탄압을 받았다. 결국 1926년 8월에 박춘우(朴春宇)가 쓴 「모스크바에 새로 열린 국가 농촌학원」이라는 사회주의 관련 글이 빌미가 되어 『개벽』은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다.

▶ 관련자료

ㆍ개벽(開闢)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