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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제목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한자명 南滿洲鐵道株式會社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청(淸),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06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만주 침략과 만주 식민지 경영을 위해 존재했던 일본의 국책 회사.

[내용]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는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철도 및 부속지를 기반으로 1906년 설립되었다. 1906년 1월 일본 육군 참모총장인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를 위원장으로 한 만주경영위원회가 조직되어, 만주의 철도를 경영하기 위해 군사적 성격을 가진 주식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이하 ‘만철’)의 자본금은 2억 엔으로, 이 중에 1억 엔은 일본 정부가 현물 출자하였다. 1906년 11월에 고토 심페이(後藤新平)가 초대 총재로 임명되었고, 12월에 설립 등기를 완료한 후 1907년 4월부터 영업을 시작하였다. 초기엔 다렌(大連)에 본사를 두었지만, 이후에는 신징(新京)으로 옮겼다.

만철은 철도 사업을 중심으로 광업, 제조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사업을 진행했지만, 단순히 경제적 목적만을 가진 주식회사는 아니었다. “만주 경영의 유일한 비결은 겉으로 철도 경영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각종 시책을 단행함에 있다”고 한 고토 심페이의 주장이 보여 주듯이, 만철은 본질적으로 일본의 만주 식민화와 만주 경영을 위한 국가 기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1년 8월 23일 만철의 관할이 철도를 관리하는 체신국에서 국외 영토나 식민지를 관장하는 척식국(拓植局)으로 이관된 것은 만철이 만주 경영을 위한 국가 기관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실제로 만철은 철도의 운영만이 아니라 철도 연변의 부속지에 대한 행정권도 가지고 있었다. 만철의 설립은 군사적 정복을 통한 경제적 침탈이 아니라 경제적 침략을 토대로 한 군사적 정치적 정복을 획책하는 식민화 전략의 일환이었다.

식민지 지배는 단순히 무력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학문⋅예술 같은 문화적 시설이 필요하다는 ‘문장적 무비(文裝的 武備)’를 주장한 고토 심페이는 문화적 시설의 활용을 위해 과학적 조사 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고토 심페이의 철학이 반영되어 만철에는 만주에 대한 광범한 조사와 연구를 하는 조사 기관 설치가 추진되었다. 1907년 4월 만철 본사에 조사부가 설치되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1908년 11월에 도쿄에 동아경제조사국이 설치되었다. 일본 최초의 중국 본토 조사 기관이었던 만철 조사부의 초대 책임자는 교토대학 교수였던 오카마쓰 산타로(岡松參太郞)가 맡았다. 이 외에도 중앙시험소와 지질연구소가 설치되어 각종 자원에 대한 조사 활동이 진행되었다. 만철 조사부는 만주에 대한 지리⋅역사⋅자원에 대한 조사뿐만 아니라 철도 연변의 부속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술 개발, 도시 계획 등을 활발히 조사⋅연구하면서 점차 강력한 ‘두뇌 집단’으로 발전해 나갔다. 만철 조사부는 일제의 만주 경영에서 가장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만철은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직이 재편되었다. 만철 조사부는 만철 경제 조사회로 바뀌었고, 관동군과 함께 ‘만주 산업 개발 5개년 계획’ 등 장기적인 산업 계획을 입안하면서 조사 및 정책 기관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만철은 1945년 만주가 소련에 의해 점령되자 실질적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1945년 9월 30일 도쿄에서 연합국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만철의 폐쇄가 결정되었다. 만주의 점령을 통해 높은 기술을 가질 수 있었던 만철과 만철 조사부의 핵심 인물들은 일본의 패전 이후 극히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는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이들은 일본의 전후 부흥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