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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학 운동

제목 조선학 운동
한자명 朝鮮學運動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30년대 일제의 식민 사관과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서구 문명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경향과 민족을 경시하는 일부 공산주의 사상 경향을 비판하면서 한국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탐구하고 근대 민족 국가 수립의 가능성을 실학에서 찾으려고 했던 운동.

[내용]

조선학 운동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언론 기관의 적극적 지원 속에 1934년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본격화하였다. 주도 인물이었던 연희전문 교수 정인보(鄭寅普, 1893~1950)와 조선일보에서 활동했던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등은 단군 이래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발전을 긍정하는 가운데, 허학(虛學)이 되어버린 기존 유교인 주자학에 대신하여 새로운 사상 경향으로서 조선 후기 특정의 학문 경향이었던 실학에 주목하였다. 정인보는 실학을 민족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는 학문인 동시에 백성의 일용과 민족과 나라의 실익을 가져다주는 민족 단위의 학문으로 규정하였다. 이들은 그 가운데서도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주목하였다. 1935년에도 다산 100주년 기념사업이 이어졌고, 『여유당전서』 출간을 통해(1938년 완간) 정약용의 학문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조선학 운동은 기본적으로 일제의 식민 지배를 사상적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제 관학의 식민 사관 및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개된 운동이었다. 1925년 조선사 편수회가 총독 직속의 독립 관청으로 설립되어 관 주도의 식민주의 역사학을 확산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조선사 편수회는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에 입각한 식민 사관으로 한국사를 왜곡한 『조선사』를 1932년부터 간행하기 시작하여 1938년 전 37권으로 완간하였다. 또한 청구학회(靑丘學會), 경성 제국 대학 등과 연계하여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왜곡된 연구를 진행하였다. 조선학 운동은 이러한 일제의 한국사 왜곡과 식민 사관 확산에 대한 비판과 극복을 목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조선학 운동은 문명개화론(文明開化論), 서화론(西化論) 등으로 상징되는 한국 역사의 문화 자산과 성과를 부정하고 서양 근대 사상과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입하여 이를 추종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증과 고증을 기반으로 한국 역사와 문화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탐구하고, 민족을 단위로 하는 독자적인 한국 근대 국민 국가 수립의 지향과 역사를 실학을 통해 입증하려 했다.

1931년 5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가 민족주의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급 대 계급’ 전술에 입각하여 혁명적 농노조 운동과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던 공산주의 세력의 주도하에 해소되었다. 민족 협동 전선 결성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주의 세력의 정치적 단체 결성에 대해서도 일제는 탄압하면서 허가하지 않았는데, 공산주의 세력도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런 일제와 공산주의 세력 양쪽에서의 공격 때문에 민족주의 세력의 민족 운동 조직 결성은 물론 여타 정치 활동도 어려워졌다. 이에 민족주의 세력들은 민족 운동의 ‘사상 혁신’과 문화 운동을 주장하였다.

조선학 운동은 이런 민족주의자들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민족주의가 조선 민족의 지도 원리이자, 사상 혁신의 기준이라는 것을 제기하면서 이를 위해 조선만의 사상을 마련해야 하며,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자주적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인보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양명학연론」과 「오천년간 조선의 얼」은 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안재홍은 조선인의 문화적 순화, 심화, 정화를 목적으로 ‘조선학’ 수립을 위해 문화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한국 민속이나 토속적인 것의 문화 가치를 현양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주체적인 근대 민족 국가의 가능성을 한국 역사 전통에서 찾고, 이를 기반으로 민족주의 이념에 기초하여 한국인의 진로를 모색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점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조선학 운동은 민족주의 사상과 이념을 국수주의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한국 역사와 문화, 사상의 독자적 발전에 대해 부정하면서 소련과 코민테른을 추종하는 일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까지도 내포하는 것이었다.

정인보와 안재홍이 주도한 조선학 운동에 대해 상당수 사회주의 계열의 지식인들은 과거에 매몰된 감상적 복고주의라고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사회 경제 사학자 백남운 등 일부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조선학 운동의 관념적론적 과학관이나 방법론에 대해서는 반대하면서도, 마르크스 사회 경제학에 기초한 과학적 연구방법론으로서 ‘비판적 조선학’을 주장하면서 조선학 운동에 부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외래의 이념과 학문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며, 한국 역사가 세계사적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독자적인 발전 과정을 하였다는 인식을 공유하였다.

일제는 1936년 8월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을 계기로 조선학 운동의 유력한 후원처였던 한국의 언론 기관을 억압하여 무력화시켰다. 1937년 중일 전쟁 전후로는 허울뿐인 ‘내선일체’을 주장하면서 보다 강화된 사상 통제와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일제는 일체의 조선적인 사회⋅문화⋅학술 활동을 억압했으며, 전 방위적인 친일 전향의 압박을 가했다. 이렇게 일제가 식민지 억압과 통제를 강화하였기 때문에 조선학 운동은 사상적 이론적 모색과 연구를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곧 수그러들게 된다.

그럼에도 조선학 운동은 일제의 식민 사관과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역사학의 부활과 실학 연구의 초석을 다졌고, 독자적인 한국 민족주의 사상을 정립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