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용어 해설시대별 > 전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목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한자명 在美韓族聯合委員會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미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41년 결성된 미주 한인 단체들의 대표적인 연합 단체이자 항일 독립운동 단체.

[내용]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이승만(李承晩) 계열의 동지회에 미주 및 하와이에 있는 한인 각 단체를 대상으로 한 연합 대회를 제의했다. 그리고 11월에는 준비회를 갖고 연합 기관을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를 바탕으로 이듬해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 한족 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 결의를 통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이하 ‘연합회’)가 구성되었다. 연합회는 재미 한인 사회의 안녕과 복지를 도모하고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하 ‘임정’)의 봉대(奉戴), 군사 및 대미 외교 활동 등 독립운동의 전개, 독립금 수합 등을 주장하였다. 연합회는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등 총 9개 단체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이로써 연합회는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어 미주 한인 사회 단체가 처음으로 통일된 이후 최대의 연합 단체가 되었다.

연합회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의사부와 북미 로스앤젤레스의 집행부로 나뉘어 위원제로 운영되었다. 연합회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의사부의 경우 위원장 이원순⋅박상하, 부위원장 안원규, 재무 조병요⋅손승운, 서기 도진호⋅김원용⋅정두옥, 국방위원 김현구, 선전부장 전경무 등이 있었다. 집행부의 경우는 위원장 김호⋅한시대, 부위원장 김병연, 서기 장세운⋅한영문⋅곽림대, 재무 송종익⋅송철, 국방과장 송헌주⋅최능익, 선전과장 김용성 등이 맡았다. 연합회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매년 1회 전체위원회를 개최하여 활동 방향을 결정했다. 일정한 중앙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각 부서의 운영은 자율적으로 이뤄졌으며, 이로 인해 회원 단체에 대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연합회는 각종 후원금을 독립금으로 통일하여 모금했다. 독립금 수입 중 2/3는 충칭의 임시 정부에, 1/3은 임시 정부의 대미 외교 활동을 벌이기 위해 설립한 미국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에 지원했다. 또한 1942년 4월 전체위원회에서 연합회는 충칭 특파원 계획을 수립해 미주와 임시 정부 사이의 연락 사무와 임시 정부의 대외 활동 지원, 연합국의 대일 항전 승리를 위한 정보 수집 등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이 계획은 이승만과 임시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 밖에 연합회는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호놀룰루에 한인경위대(韓人警衛隊)를 만들어 광복군 산하 조직으로 조직하려 했다. 또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을 도와 국방 공채 발매와 각종 위문 활동 등 미국에 대한 지원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연합회는 설립 직후부터 내홍을 겪었다. 이승만과 한길수(韓吉洙) 사이의 갈등이 빚어지면서 한길수가 1942년 1월 연합회를 사직하자, 그를 지원하던 중한민중동맹단과 조선 의용대 미주후원회도 연합회를 떠났다. 1943년에는 연합회와 이승만 사이에 주미외교위원부 사무 확대 문제로 분쟁이 발생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관장하는 미주 외교위원부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 단체들이 운영되어야 한다며, 연합회를 종속시키고 연합회가 걷는 독립금을 넘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연합회는 전체 미주 한인의 회의를 거쳐 성립되었기 때문에 외교위원부와 같은 임시 정부의 대리기관에 종속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의견 대립 속에 동지회의 이승만 지지자들이 연합회를 거치지 않고 이승만에게 직접 자금을 송부하자, 연합회 집행부는 외교위원부에 송금을 중단했다. 한편 연합회는 이승만이 독점하고 있는 외교위원부를 개조하여 연합회도 참가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였다. 때문에 연합회는 임시 정부에 이승만의 외교위원부 위원장 면직을 청원하였다. 결국 1943년 12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는 연합회를 탈퇴했다. 이후 연합회는 1944년 6월 외교위원부와 별도로 워싱턴사무소를 설치하여 연합회 자체의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8월 임시 정부는 연합회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여 외교위원부의 개조를 지시했다. 10월 미주 단체들이 모여 외교위원부의 개조안을 제출하였다. 그렇지만 임시 정부는 이 합의를 무시하고 11월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하는 주미외무위원회 설립을 공포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미주 사회가 극심하게 분열하게 되었으며, 연합회의 임시 정부 재정 지원도 급감했다.

이들은 1945년 광복 때까지 각종 국제회의와 미국 내 주요 단체들에게 한국 문제를 여론화하는 활동을 전개했으며, 재미 한인과 미군에 귀순한 한인 포로들의 미군 군사 작전 참여 알선 등의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연합회는 1945년 11월과 1946년 2월 2차에 걸쳐 한국에 대표단을 파견해 독립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대표단은 중간파 세력이 연합하여 민주독립당을 결성할 때 참여하였으나 국내 정치 기반의 한계로 뚜렷한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