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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편수회

제목 조선사 편수회
한자명 朝鮮史編修會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조선 총독부가 식민 지배의 합리화를 위한 한국사상(韓國史像)을 구축하기 위해 1925년 설치한 한국사 연구 기관.

[내용]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뒤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한국사 편찬에 착수했다. 병합 직후부터 사서 편찬이 시도되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1915년 중추원(中樞院)이 한국사 편찬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고, 『반도사』 편찬 계획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편찬은 같은 해 박은식(朴殷植)이 일제의 조선 침략 과정을 폭로하는 『한국통사(韓國痛史)』를 발간하여 항일 의식을 일깨우게 하는 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반도사』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동족이기 때문에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은 당연한 것이며, 조선사는 외세에 의해 지배받은 역사라는 점을 왜곡⋅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관련 자료 수집과 『반도사』 저술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총독부는 새롭게 『조선사』 편찬 계획을 수립하고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했다. 편찬위원회를 통해 일제는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인의 조선사 연구, 고대사 연구를 관변 역사학으로 유도하려 했다. 편찬위원회는 자료 수집을 위해 구래(舊來)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조선 각지의 양반가⋅유력 가문을 포섭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 가문들이 『조선사』의 공정성을 의심하면서 자료 수집에 차질을 빚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찬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것이 조선사 편수회였다. 1925년 6월 설치된 조선사 편수회는 총독 직속의 독립 관청으로서, 편찬위원회보다 직제의 격을 높였고 역사 편찬에 필요한 실무진 위주로 구성되었다. 편수회는 회장과 고문, 위원, 간사와 수사관, 수사관보, 서기 등으로 구성되었고, 이 밖에 수시로 촉탁위원을 두었다. 회장은 당연직으로서 정무총감이 맡았다. 직원 대부분은 총독부 고위 관료나 경성 제대 교수 등 일본인 학자들로 구성되었고, 한국인도 일부 참여했다. 고문에 이완용과 권중현, 박영효 등이, 위원에는 이진호(학무국장), 유맹, 어윤적, 이능화, 최남선 등이 있었다. 홍희와 신석호는 수사관, 이병도는 수사관보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조선사 편수회는 이후 1938년 『조선사』(전 37권)를 완간하고, 수집한 사료들을 선별하여 『조선사료총간』(전 22권), 『조선사료집진』(전 3권) 등 사료집을 편찬했다. 이 사료집들은 식민 통치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취사⋅편집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단군조선이 부정되었고, 한국의 역사상은 정체되고 타율적인 것으로 그려졌다. 왜곡된 역사 인식과 민족의식이 생산되었다. 일제는 편수회를 통해 종래 개인 학자들이 연구해 오던 식민주의 역사학을 관 주도의 연구 체제로 흡수할 수 있었다. 또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식민 사학의 심화를 기할 수 있었고, 연구 시기도 기존에 고대사 중심에서 조선 시대로까지 한국사 전반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한편 편수회는 조선사학회(朝鮮史學會)와 청구학회(靑丘學會) 등 식민 사관을 생산하는 학술 단체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식민 사학의 저변을 넓혀나갔다.

▶ 관련자료

ㆍ조선사 편수회(朝鮮史編修會)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