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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신성비

제목 경주 남산 신성비
한자명 慶州南山新城碑
유형
시대 삼국 시대
관련국가 신라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591년(신라 진평왕 13년) 신라 도성인 경주(慶州)의 남산(南山)에 산성(남산 신성)을 쌓을 때 축성 공사와 관련한 내용을 새겨 세운 비석.

[내용]

지금까지 총 10개의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각 비문의 내용과 형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신해년(辛亥年), 즉 591년 2월 26일 비석을 세우면서 만일 3년 안에 성벽이 무너지면 죄를 달게 받겠다는 맹세를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축성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심어 주기 위한 문구로 모든 비석에 공통으로 들어가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하는 책임자의 명단이다. 이 축성 공사에는 신라의 여러 지역에서 백성들이 동원되었는데, 명단에 등장하는 사람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과 각 지역의 유력자들이다. 따라서 남산 신성을 쌓을 때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해당 지역의 유력자들을 통해 필요한 인원을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에 지역 유력자들이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또 당시 신라 지방이 군(郡)-성(城)⋅촌(村)이라는 행정 단위로 구성되었고, 성⋅촌이 지방 행정의 근간을 이루었음도 알 수 있다.

세 번째 부분은 담당한 공사 구간의 길이를 적었는데, 각 비마다 작업 집단의 규모나 지형 조건이 달라 담당 구간은 조금씩 차이가 났다. 예컨대 제1비는 11보 3척 8촌이었고, 제2비는 7보 4척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남산 신성의 규모가 2850보이므로, 최소 200개 이상의 공사 구간이 설정되었을 것이고 그 수만큼 비석이 세워졌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더 많은 남산 신성비가 발견될 수 있다.

[의의]

「경주 남산 신성비(慶州南山新城碑)」는 6세기 말 신라의 축성 방식은 물론, 지방 통치 제도와 인력 동원 체제에 대해서도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문헌 사료만으로는 확인하기 힘든 귀중한 내용으로, 6세기 신라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관련자료

ㆍ경주 남산신성비(慶州南山新城碑)
ㆍ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