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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제목 계유정난
한자명 癸酉靖難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계유사화(癸酉士禍)
별칭•이칭

[정의]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1468)이 측근들과 함께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의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던 사건.

[내용]

계유정난은 문종(文宗, 재위 1450~1452)이 죽고 단종(短宗, 재위 1452~1455)이 즉위한 직후부터 추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양대군은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뒤 자신의 세력을 모았다. 이후 수양대군은 심복들과 함께 김종서의 집을 습격해 그를 죽였다. 김종서가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여 죽였다고 보고한 뒤 왕명을 얻어 황보인과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등을 궁궐로 불러들여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김종서의 가족들을 처형하고, 조극관 등의 가족은 귀양을 보낸 뒤 죽였다. 김종서⋅황보인 등과 함께 모반을 계획했다고 모함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강화로 귀양을 보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왕명을 내려 자살하도록 조치했다.

계유정난을 마무리 한 수양대군은 영의정과 이조⋅병조판서는 물론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새로 설치하고 자신이 모두 겸직했다. 그는 인사권과 군사권을 모조리 장악하면서 사실상 국정 책임자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아울러 자신을 포함한 측근 43명을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하면서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선양(禪讓)을 받는 형식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세조이다.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는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 과정에서 자신이 태조(太祖, 재위 1392~1398)를 이어 제2의 창업 군주, 조종(祖宗)이 되는 군주라고 설명했다. 또한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결탁해 모반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주장을 유지했다. 세조는 자신이 단순한 수성(守成)의 군주가 아니라 창업 군주에 준하는 위상을 가진 국왕이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에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추진되었던 개혁 정책들의 방향을 최대한 계승하면서 자신이 정당한 후계자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또한 당시 제기되려고 했던 지방 사족(士族)들의 다양한 사회 불만을 권력으로 억누르면서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에 후대 국왕들의 국정 운영에 많은 부담을 주게 되었다.

▶ 관련자료

ㆍ계유정난(癸酉靖難)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