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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제목 훈련도감
한자명 訓鍊都監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훈국(訓局), 훈련도감(訓練都監)
별칭•이칭

[정의]

임진왜란 이후 서울을 수비하기 위해 창설한 군영.

[내용]

1. 훈련도감의 설립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 재위 1567~1608)가 몽진(蒙塵)을 갔다가 서울로 다시 돌아온 1593년(선조 26) 10월 설립되었다. 임진왜란 초반에 패전으로 국가의 존립이 위험한 상황에서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는 군사력을 키우고 국왕의 시위, 서울의 경비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나타난 논의가 훈련도감의 창설로 이어졌다. 훈련도감의 설립은 포수의 양성에서 시작되었다. 조총에 대응하고자 임란 발발 5개월 후인 1592년(선조 25) 의주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수에게 포수 양성을 처음 의논하였고 훈련도감의 주력으로 포수를 양성하게 하면서 직접적으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이후 1593년(선조 26)에 설치된 의용대(義勇隊)가 훈련도감의 살수(殺手)에 편제되었고, 1594년(선조 27) 6월에는 사수(射手)가 포함되어 훈련도감은 삼수병(三手兵) 체제를 완성하였다. 또한 임란 이후 훈련도감은 왜적이 아닌 여진족의 성장에 따른 기마병을 막기 위해 마병(馬兵)이 인조(仁祖, 재위 1623~1649) 대에 추가되었다.

2. 훈련도감의 역할

훈련도감이 설치된 이후 가장 주요한 임무는 중앙군으로 국왕을 시위(侍衛)하는 것이었다. 16세기 들어와 군역제가 동요하면서 중앙군이 부실하게 되었고 국왕을 시위하던 군사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는 실제로 임란 당시 국왕을 보호할 군사가 부족함으로 나타났고, 훈련도감은 이를 해결해 주었다. 또한 훈련도감군은 서울을 전체적으로 방어하고 궁궐을 수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왕과 서울을 수비하였던 최정예 군대였던 만큼 무기나 진법의 훈련이 가장 잘 되어 있었고, 이에 지방군을 훈련시키는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도성을 방어하고 왕을 시위하는 훈련도감의 역할은 1881년(고종 18) 별기군(別技軍)이 설치되어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3. 훈련도감의 운영

훈련도감 창설 이래, 1662년(현종 3)에는 7천 명 정도의 도감군이 있었고, 이후 조선 후기 내내 대략 5천 명 정도의 규모가 유지되었다. 이전 군병들은 역으로 복무하였던 것에 비해 훈련도감군은 급료병으로 운영되다 보니 국가는 재정적으로 부담을 지게 되었다. 또한 도감군은 항상 근무하는 장번병(長番兵)으로 점차 도망하는 인원들이 나타나는 등 창설 당시 운영 방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우선 재정적 부담을 분산시키기 위해 도감군의 급료를 관장할 군향청(軍餉廳)을 설치하였다. 또한 도감 운영비의 일부를 담당하던 호조의 재정 압박을 덜어 내기 위해 1602년(선조 35) 삼수미세(三手米稅)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액을 보충하고자 계획했다. 또한 도감군이 장번병으로만 구성되어 생기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1669년(현종 10) 훈련도감 별대를 창설하여 계속해서 근무하는 장번병이 아닌 일정 기간 근무하고 교대하여 내려가는 번상병제(番上兵制)를 채택하였다. 번상병제의 채택으로 국가의 재정적인 문제는 경감될 수 있었다.

▶ 관련자료

ㆍ훈국(訓局)
ㆍ훈련대장(訓鍊大將)
ㆍ훈련도감(訓練都監)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