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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서관

제목 검서관
한자명 檢書官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조선 후기 규장각(奎章閣)에 소속된 실무 담당자.

[내용]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즉위 초 국왕을 중심으로 한 탕평 정치와 학술 진흥을 위한 중심 기구로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의 본래 목적은 역대 선왕들의 어제(御製)를 간행, 보관하는 것이었지만 『일성록(日省錄)』을 편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였다. 검서관은 규장각 안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관원이었는데, 오늘날의 도서관 사서(司書)와 유사한 직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검서관의 정원은 4명이었고 특별히 서얼 출신들을 채용하였다. 당시 서얼은 신분적 한계로 말미암아 관직 진출이 어려웠는데, 정조는 문예가 뛰어난 서얼을 채용함으로써 서얼이 학문적으로 명망을 떨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779년(정조 3)에 발탁된 초대 검서관은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였다. 이들의 발탁은 정조가 서얼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면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추진했던 서얼허통정책(庶孼許通政策)을 시행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이후 결원이 생길 때 전임 검서관들이 후보자를 추천하면 규장각 각신들(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이 시험을 실시하여 검서관을 선발하였다.

검서관은 규장각 각신을 도와 서적을 편찬하고 간행할 때 교정과 필사를 담당하였고, 간행된 서적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 검서관이 핵심이 되어 서적을 편찬⋅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서적의 편찬과 간행은 정조 재위 시절에는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정조 사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반면, 서적의 보존과 관리는 계속해서 검서관의 주요 역할로 지속되었다. 또한 『내각일력(內閣日曆)』, 『일성록』 및 초계문신(抄啓文臣)의 강설(講說)을 기록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이 외에도 검서관은 규장각과 관련한 왕명이나 각종 문서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의의]

정조의 학술 진흥과 친위 관료 양성을 통한 왕권 강화 정책 속에서 출발한 규장각의 실무 관료인 검서관은 신분 제한으로 관직 진출이 막혀있던 서얼을 발탁함으로써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통로이자 유능한 서얼이 출세할 수 있는 통로였다.

▶ 관련자료

ㆍ검서관(檢書官)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