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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학

제목 고증학
한자명 考證學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청(靑)
유의어 한학(漢學), 고거지학(考據之學), 박학(樸學)
별칭•이칭

[정의]

청나라 초 성리학과 양명학에 대항하여 실증적 연구 방법을 강조하면서 등장한 학문적 경향.

[내용]

고증(考證)이란 객관적 증거를 모아 사실을 밝히는 작업이며, 이는 모든 학문 연구에서 필수적인 기초 수단이다. 그러나 청나라 초 발생한 고증학은 기존의 학문인 성리학과 양명학이 공리공담(空理空談)에 치우쳐 실제 정치 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비판하면서 대두된 새로운 학풍이었다. 새로이 등장한 청초의 고증학자들은 경전(經典)의 정확한 해석을 토대로 하여 학문적⋅도덕적 자기반성을 이루고, 나아가 제도 개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실사구시(實事求是), 다시 말해 경전의 기존 주석을 뛰어넘어 경전의 자구(字句)를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연구 방법을 채택하였다. 명나라 전반기 사상을 독점한 성리학이나 후반기에 유행한 양명학에 이어 청대에 대두된 고증학은 그 정밀하고 치밀한 정도와 객관성 때문에 높은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송명이학(宋明理學)과 대비하여 청조한학(淸朝漢學)이라 불릴 정도로 이전의 성리학을 상대화시키기도 했지만, 이는 학문의 방법론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사상적인 성격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고증학을 ‘학(學)’이 아니라 ‘술(術)’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조선은 주자학적 가치관이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 500년간 기득권의 지위를 유지하여 중국에서 유행한 양명학과 고증학은 크게 번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차원에서 고증학적 방법론이 일부 도입되기도 하였다. 박세당은 『사변록(思辨錄)』에서 경전에 주해를 다는 방식으로 주자학을 비판하였고, 여러 방면에 걸친 백과전서식 저술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살펴보면 그 서술 방식과 내용이 중국의 대표적 고증학자 고염무의 『일지록』과 유사하다.

고증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들 수 있다. 정약용의 경우 경전을 기존의 주석서, 곧 주희의 주석과 전혀 다른 틀로 해석하고 사서(四書)의 자구를 새롭게 분석하였으며, 김정희의 경우 옛 비석 등을 해석하는 등 금석학(金石學)에 정통하였다. 그러나 고증학적 연구 풍토는 이후 크게 번성하지 못하였다.

[의의]

고증학에서 강조하는 실사구시는 어떤 학문에서도 필요한 연구 방법이다. 고증학을 통해 조선 후기 성리학이 교조화되는 상황에서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풍토를 마련할 수 있었다.

▶ 관련자료

ㆍ고증학(考證學)
ㆍ고증학파(考證學派)
ㆍ박학(朴學)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