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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

제목 북인
한자명 北人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조선 후기 붕당 정치 심화에 따라 동인(東人)에서 나뉜 정파(政派).

[내용]

1. 붕당 정치 속 북인(北人)의 발생

조선 시대는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사림(士林)이 정권을 잡은 이후 지역적 토대와 학문적 경향에 따른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다양한 정파가 성립하였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대 초반 형성되었던 동인과 서인 중 동인은 이후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남인과 북인의 분열은 1589년(선조 22)에 발생한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촉발되었다. 기축옥사, 다시 말해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은 실체가 모호하여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는 사건이다. 이때 정여립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많은 인물이 희생되었다. 이때 기축옥사를 주도했던 것은 국왕 선조였고,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은 사람들은 대개 국왕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했던 인물들이었다. 북인들은 정여립 모반을 완전한 조작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보다 실천적이고 급진적인 서경덕(徐敬德), 조식(曺植) 계열의 학파였다. 반면 남인들은 국왕에 대한 불경죄 부분을 수긍하였다. 보다 보수적인 이황(李滉) 계열의 학파가 대체로 이 판단을 지지하였다.

북인은 전제적 군주권이 초래하는 정치의 파행을 막기 위해 사림의 공론(公論), 즉 공명정대하고 바른 의론이 우위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남인은 군주권을 가장 우위에 둘 것을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기축옥사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에 남인과 북인의 분열과 대립은 매우 심각했다.

2. 광해군 대 북인의 정권 장악

북인은 비타협적이고 강경한 입장에서 실천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다. 임진왜란 때의 활약으로 입지를 굳힌 북인은 선조 말년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분열하였다.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대북이 정권을 장악했고,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명⋅청 교체의 혼란기에 노련한 외교술을 통해 국가의 실리를 도모했다.

이후 북인 내부에는 다양한 분열이 있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종장으로 모신 남인, 서인과 달리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신 북인은 상대적으로 학통상 열세에 있었다. 퇴계와 율곡의 학문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대다수의 유생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성리학이 중심이지만 노장 사상의 색채도 지니고 있었던 남명과 화담의 학풍은 일반 유생들의 지지를 얻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북 정권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광해군의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광해군의 명목상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모(廢母)하는 등 무리수를 강행하였고, 결국 이것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빌미가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대북 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고, 잔존한 소북 세력은 이후 남인에 점차 흡수되었다.

▶ 관련자료

ㆍ대북(大北)
ㆍ북인 정권(北人政權)
ㆍ북인(北人)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