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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영

제목 장용영
한자명 壯勇營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793년(정조 17)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세웠던 친위 군영.

[내용]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1785년(정조 9) 자신의 경호 부대로 설치된 장용위(壯勇衛)를 모태로 하여 1793년(정조 17)에 규모를 확대하여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그는 문반의 핵심 관료들을 규장각에 모아 두뇌 집단으로 삼고, 권력 유지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를 장용영으로 개편하여 친위 부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왜란과 호란 이후 군사 제도로 정립된 5군영은 실질적으로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군영 운영에 전권을 가지고 있는 군영대장의 임명 역시 국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웠다. 각 군영의 인사권은 군영 내에서 1명을 추천하면 병조에서 승인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병조의 인사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정조는 이를 개선하여 3명을 추천하여 이 중 1명을 병조에서 임명할 것을 1785년(정조 9) 『대전통편』 내에 법제화시켰다. 그리고 1788년(정조 12)에 훈련도감이 군영대장과 무관(武官)의 승진과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도 개선할 것을 지시하였다. 훈련도감이 아닌 병조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군영을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인사권을 가진 고위 무관들이 대체로 노론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군영의 체제나 인사권 제도 개선만으로 군권을 장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정조의 친위 군영 설치는 1777년(정조 1) 궁궐의 정조 처소인 존현각(尊賢閣)에 자객 침입 사건이 일어나면서 명분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정조는 호위 부대인 1777년 11월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했으며, 이는 뒤에 장용위, 그리고 장용영 설치로 이어졌다. 정조는 기존 5군영의 군사를 장용영에 이속시킴으로써 5군영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또한 장용영 설치에는 양란 이후 2백 년간 지속된 평화기로 문치주의의 극성기가 되자 사회가 전반적으로 문약해짐을 경계하는 뜻도 작용하였다.

장용영은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구성되었다. 내영은 서울의 본영으로 지휘관을 장용사, 장용영대장으로 불렀다. 규모는 기존의 군영보다 크게 확대하여 5사(司) 25초(哨)로 하였다. 외영은 수원 화성(華城)에 두어 5천 명의 병마를 주둔시켰다. 다음으로 용인, 안산, 진위, 시흥, 과천 등 다섯 읍의 군대 1만 3천여 명을 외영에 소속시켜 지역 공동 방위군인 협수군(協守軍)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정조는 문무 핵심 친위 기구를 조직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장용영은 단지 국왕을 호위하고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과 화성 행궁을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왕권 강화와 기존 군대 개혁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조 사후 곧바로 정조의 개혁 사업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혁파되어 재정과 군사력은 모두 기존의 군문으로 환원되었다.

▶ 관련자료

ㆍ장용영(壯勇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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