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용어 해설시대별 > 근대

황토현 전투

제목 황토현 전투
한자명 黃土峴戰鬪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황토재 전투[黃土峴戰鬪]
별칭•이칭

[정의]

1894년 4월 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격파한 전투.

[내용]

1894년 3월 20일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 전라북도 무장(茂長)에서 포고문을 발표하며 본격화된 농민 항쟁은 4,000여 명의 농민군을 바탕으로 고부(高阜) 관아를 점령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3월 26일~29일에는 백산(白山)에서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 및 12개조 기율 등을 선포하고, 농민군 총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孫化中, 1861~1895)⋅김개남(金開男, 1853~1895)을 세웠다. 그 후 태인(泰仁)으로 이동해서, 4월 1일에는 태인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미 각 고을의 아전들까지 농민군에 투신할 정도로 농민군의 세력은 커져 있었다.

전라 감사 김문현(金文鉉, 1858~?)은 농민군의 동향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또한 전주성의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전라감영군을 소집했다. 이들은 4월 3일 농민군을 막기 위해 금구(金溝)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 소식을 들은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향하다 태인 방면으로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4월 3일 밤을 태인에서 지낸 다음 일부 견제 병력만을 남기고 부안으로 이동했고, 4월 4일에는 부안 관아를 점령한 후 비치되어 있던 무기를 이용해 전열을 갖추었다. 4월 6일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부안을 떠나 고부로 향했고, 태인에 남아 있던 농민군들도 고부로 향했다. 이들은 도교산(道橋山)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도교산의 서쪽에 있는 지형이 당시 태인과 고부를 잇는 요지, 황토현이었다.

전라감영군은 전봉준이 이끌던 4천 명 규모의 농민군 주력 부대를 쫓아 고부 쪽으로 이동하였다. 4월 6일 오후 4시경 양군은 처음 조우했다. 농민군은 패배한 척하며 황토현에서 후퇴하고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 감영군이 이를 추격하여 황토현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 진을 치고 다음 날 오전까지 보내기로 하였다. 4월 7일 새벽 4시경에 농민군은 무방비 상태의 관군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감영군은 1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군의 지휘부 다수가 죽거나 도망쳤다. 황토현 전투에서 얻은 대승을 기반으로 농민군은 이후 전주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 관련자료

ㆍ황토현 전투(黃土峴戰鬪)
ㆍ동학 농민 운동(東學 農民 運動)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