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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제목 서대문 형무소
한자명 西大門刑務所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자 한국 민족운동가들을 구금하고 탄압하였던 민족의 고난과 투쟁의 장소.

[내용]

1908년 통감부가 현저동(峴底洞)에 설치한 경성감옥의 후신이다. 경성감옥이 1912년 마포 공덕리로 신축 이전하면서 남아 있던 기존의 경성 감옥 시설은 서대문 감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뒤 일제의 감옥 제도 개편에 따라 1923년 서대문 형무소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고, 이 명칭이 해방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해방 이후 1945년 서울 형무소, 1961년 서울 교도소, 1967년 서울 구치소로 개칭되어 유지되다가, 1987년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기면서 감옥으로서의 역할이 종료되었다. 현재는 역사관으로 바뀌어 민족의 고난과 투쟁의 역사를 교육하는 장소로 운영되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는 경성 감옥 시기에는 의병 운동 참가자들을 수감하는 장소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수감하는 공간이었다. 감옥은 외부와 격리된 공간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독립운동의 전파와 단결이 촉진되는 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우려 때문에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사상범(思想犯)’이라고 부르며 감옥 내에서조차도 철저하게 격리시키려 했다. 미결수(未決囚)를 구금하는 구치감(拘置監)은 1935년 신축한 건물인데, 총 283개의 감방 중 242개가 독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항소심의 경우 사상범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효율적으로 격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서대문 형무소가 다른 감옥과 다르게 사상범 위주의 수형 시설이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3⋅1 운동, 6⋅10 만세 운동, 광주 학생 운동 등에 참여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일부는 투옥 중 고문 혹은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독립운동가들의 불굴의 의지가 교차하는 곳으로 그 역사적 의의가 깊은 장소이다.

▶ 관련자료

ㆍ경성 감옥(京城監獄)
ㆍ서대문 형무소(西大門刑務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