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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통의부

제목 대한 통의부
한자명 大韓統義府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22년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결성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

[내용]

1920년 간도 참변과 1921년 자유시 참변을 거치면서 만주 지역 무장 독립군 부대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다시 독립운동의 기반을 재건하고 독립 전쟁의 전선을 재정비하려는 움직임이 만주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서간도 지역에서는 1922년 봄 서로 군정서, 대한 독립단, 광한단 등의 대표들이 모여 ‘남만통일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 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대한 통군부의 간부들로는 총장 채상덕(蔡尙德), 비서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 군사부장 이천민(李天民),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등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주로 서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단의 간부들이었다.

대한 통군부는 1922년 6월 3일 중앙직원회의를 개최하고 남만주 일대의 다른 기관과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922년 8월 23일에 남만주 지역의 8단 9회의 대표 71명이 모여 ‘남만 한족 통일 회의’를 열었고, 8월 30일 남만 한족 통일회 회장 김승만(金承萬)의 명의로 대한 통의부(大韓統義府)의 결성을 발표하였다. 대한 통군부가 확대 개편된 대한 통의부의 간부는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 비서과장 고활신,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참보부장 이천민, 사령장 김창환 등이었다. 대한 통의부는 군사 활동과 한인들의 자치 행정을 아우르는 조직으로 군정부의 형태를 갖췄다. 대한 통의부의 군대 명칭은 의용군으로 5개의 중대와 독립소대, 유격대, 헌병대로 이루어졌다.

대한 통의부는 성립 당시부터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공화주의와 복벽주의 사이의 갈등이 심각하였다. 공화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은 양기탁(梁起鐸, 1871~1938)이었으며, 복벽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은 전덕원(全德元, 1870~?)이었다. 이들의 갈등은 무력 충돌로까지 번졌고, 결국 전덕원을 비롯한 복벽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1923년 2월 대한 통의부를 탈퇴하고 새롭게 의군부(義軍府)를 창설하였다. 대한 통의부와 의군부로 분립된 이후에도 양자 사이의 대립과 내부 분열이 계속되자, 대한 통의부 의용군 제1⋅2⋅3중대와 유격대⋅독립소대는 1924년 5월 대한 통의부 탈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분열과 대립을 비판하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교섭하여 임시 정부 산하의 무력 단체인 참의부(參議府)를 설립하였다.

의용군의 대거 이탈로 대한 통의부는 곤경에 처했다. 남아 있던 제4중대를 중심으로 제5⋅6⋅7⋅8중대를 새로 편성하여 기존과 같은 5개의 중대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의군부, 참의부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1924년 11월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통의부에 잔류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정의부에 합류하게 되면서 자연히 해소되게 된다.

▶ 관련자료

ㆍ통의부(統義府)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