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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

제목 동광
한자명 東光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26년 경성에서 민족운동 단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기관지 성격으로 발행된 종합 잡지.

[내용]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1913년 미국에서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 지부 성격의 수양동맹회가 1922년 2월 서울에서 결성되었고, 7월에는 평양에도 같은 성격의 동우구락부가 결성되었다. 이 두 조직은 1926년 1월 수양동우회로 통합하였다. 통합과 함께 기관지 발간을 준비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발행된 것이 『동광』이다. 『동광』은 1926년 5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1927년 8월 통권 16호를 발간하고 휴간하였다. 제3호는 원고가 압수되어 발행되지 못했다. 이후 1931년 1월 다시 속간되어 1933년 1월 통권 40호까지 발간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주요한(朱耀翰)이었다. ‘동광’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는 김여식(金麗植)으로 알려져 있다.

『동광』에는 안창호와 이광수(李光洙, 1892~1950)는 물론 주요한, 박현환(朴賢煥), 김윤경(金允經), 이윤재(李允宰) 등 수양동우회 간부들이 주요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수양동우회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였다. 안창호는 산옹(山翁)과 섬메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동광』에 수양동우회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논설을 주로 실었다. 수양동우회가 『동광』을 통해 강조한 내용은 무실(務實), 역행(力行), 신의(信義), 용기(勇氣)의 4대 정신으로 무장하고 덕육(德育)⋅체육(體育)⋅지육(智育)을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 우리 민족 재생의 근본이라는 것이었다. 수양동우회 이념에 관한 글 외에도 『동광』은 편집 방침으로서 “건전한 흥미 기사, 과학의 대중화, 풍부한 삽화, 국문용법의 통일” 등을 내세우면서 다양한 논설과 문예물을 실었다. 이 가운데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논설도 다수 게재되어, 최남선(崔南善), 안확(安廓), 황의돈(黃義敦), 장도빈(張道斌), 권덕규(權悳奎), 손진태(孫晉泰), 이능화(李能和) 등 당대의 주요 역사가들이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또한 한글 관련 논문들도 상당수가 발표되었다. 특히 제8호에 안확이 실은 「한글의 연구」와 「조선어연구의 실제」를 놓고 지상토론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29년 11월 수양동우회는 동우회로 개편된다. 동우회는 규약에 혁명대당의 일지대(一支隊)라는 조항을 삽입하는 등 더욱 정치적 성향을 띠게 되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인격 수양과 실력 양성을 계속 표방하였다. 동우회로 개편된 뒤 『동광』의 속간이 모색되었는데, 이는 이광수를 주축으로 이뤄졌다. 이광수는 속간사에서 “시국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타당한 비판을” 갖고, “민족적 본성을 구명하”며, 민족적 이상을 확립하여 이에 도달하는 진로를 찾자고 언명했다. 속간 이후 『동광』은 동우회의 기관지로서의 역할보다는 좀 더 시사적인 종합 잡지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필진의 폭이 넓어졌고 국내외에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들을 포괄하면서 서술 폭도 넓어졌다. 실제 속간호인 17호에는 해외 정세와 정치가, 또는 문인에 대한 분석 논문이 게재되었다. 18호부터는 당시 첨예했던 신간회 해소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 인사들의 견해가 꾸준히 실렸다. 이 밖에 당면 문제였던 교육 문제(18호), 농업 문제(20호, 36호), 재만동포 및 만주 문제(26호), 간도 문제(33호)를 비롯해 민감한 국제 정세(‘중국특집’30호) 등에 관한 집중 분석이 이뤄졌다.

한편 동우회는 당시 지상 대학 강좌가 유행하자 『동광』에도 동광대학이라는 지상 강좌를 열어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하였다. 또한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의 인물평도 비중 있게 실었다. 『동광』은 이후 1933년 6월에 『동광총서』로, 1954년 9월에는 『새벽』으로 제호가 바뀌면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새벽』은 1961년 1월까지 총 52호가 발간되었다.

▶ 관련자료

ㆍ동광(東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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