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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단

제목 민생단
한자명 民生團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중국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간도 거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과 한인 자치를 표방하며 1932년 짧은 기간 존속하였지만, ‘반민생단 투쟁’ 사건의 명분이 된 친일 단체.

[내용]

민생단은 1932년 2월 친일 단체인 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 이사 조병상(曺秉相)과 조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 부사장 박석윤(朴錫胤) 등이 중국 용정(龍井)에 와서 설립한 친일 단체였다. 이들은 1931년 9월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만주 출병이 간도 거주 한인들의 권익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선동하여 민생단을 조직하였다. 민생단은 일본 간도 총영사관의 허가를 받아 설립되었으며, 간도 거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과 산업 진흥을 표방하였다.

민생단은 친일 한인이 핵심 구성원을 이루었지만, 간도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한인의 자치를 추진해 오던 민족주의 계열의 한인들도 일부 참여하였다. 그들은 공민권 획득과 한인의 자치 구역 확보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참여했다. 공산주의 계열은 민생단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2년 5월 일제가 간도 지역에서 한인의 자치를 불허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같은 해 7월 민생단은 스스로 해단 선언을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6개월여의 짧은 기간 동안만 존재했던 민생단이 문제가 된 것은 1932년 10월 중국 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이하 동만특위)가 시작한 일제 스파이 조사 사업 때문이었다. 동만특위는 중국 공산당과 유격대 내부에 민생단의 밀정(密偵)이 잠입했다며 한인 당원과 유격대를 대상으로 철저한 조사를 하였다. 조사는 무려 3년 4개월간 진행되었고, 밀정 혐의만 있어도 처형을 시킬 정도로 한인 공산주의자와 유격대원들에게 무자비하게 적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스파이 혐의로 처형된 한인은 정확한 숫자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최소 500여 명이 넘었으며, 수천 명에 이르는 한인이 스파이 혐의로 의심과 박해를 받았다. 스파이로 몰려 죽지 않기 위해 항일유격대에서 탈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동만특위는 이러한 무모한 조사를 ‘반민생단 투쟁’이라고 합리화하였다. 반민생단 투쟁으로 동만주 한인들의 항일 투쟁은 크게 위축되었다.

반민생단 투쟁은 공산주의 내부의 노선 투쟁과 지속적으로 쌓여오던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의 불신이 결합하여 발생한 사건이었다. 민생단은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당시 동만특위 소속 항일유격대원들 중에는 한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그러나 민생단과 연결된 한국인 공산주의자들과 유격대원들은 거의 없었다. 반민생단 투쟁은 한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이 항일 투쟁과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도 나타난 비극적 사건이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