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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학회

제목 조선어 학회
한자명 朝鮮語學會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조선어 연구회(朝鮮語硏究會)
별칭•이칭

[정의]

1931년 조선의 말과 글의 연구 정리 및 통일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간 학술 단체.

[내용]

조선어 학회는 각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들이 1921년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조선어 연구회는 주로 한글 철자법을 연구하였고, 동인지 『한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아 훈민정음 반포일을 ‘가갸날’ 혹은 ‘한글날’로 명명하고 기념식을 개최하는 등 한글 보급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정확한 한글 사전 편찬을 통해 우리말과 우리글의 의미를 정리하고 체계화시키며, 민족의 글과 정신을 일깨워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갱생을 꾀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사전 편찬을 위해서는 통일된 표준어와 맞춤법 등이 필요하였다. 이에 1930년 12월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1년 1월 조선어 연구회를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위한 기관인 조선어 학회로 개편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한글 사전 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조선어 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시작으로 ‘조선어 표준어 사정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차례로 확정하였다. 1940년에는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수정 발간하였으며, 본격적으로 한글 사전 편찬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글 사전은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조선어대사전』 출판을 허가받았고, 1942년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942년 10월에 발생한 이른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한글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고, 원고와 서적은 전부 압수되었다. 조선어 학회 사건은 일제가 사전 편찬에 참여하던 교사 정태진(丁泰鎭)에게서 강제로 조선어 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내면서 시작되었다. 일제는 1942년 10월부터 1943년 4월까지 조선어 학회 핵심 회원과 사전 편찬을 후원하는 찬조 회원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들에게는 치안유지법의 내란죄가 적용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이윤재(李允宰)와 한징(韓澄)은 옥사하였으며, 이극로, 최현배(崔鉉培), 이희승(李熙昇), 정인승(鄭寅承), 정태진의 5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 학회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해방 후 석방된 조선어 학회 회원들은 조선어 학회를 재건하고, 한글날 행사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한글 사전 편찬은 1945년 10월 서울역 창고에서 일제에 압수되었던 사전 원고를 되찾으며 다시 추진되었다. 조선어 학회는 1947년 한글날을 기해 『조선말 큰사전』 1권을 간행하였으며, 이후 1957년 6권 발간을 마지막으로 한글 사전 편찬을 마무리하였다.

조선어 학회의 한글 운동은 일제에 맞선 문화적 민족운동인 동시에 사상적 독립운동이었다.

▶ 관련자료

ㆍ조선어 연구회(朝鮮語硏究會)
ㆍ조선어 학회(朝鮮語學會)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