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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

제목 상수리
한자명 上守吏
유형
시대 통일 신라와 발해
관련국가 통일 신라
유의어 기인(其人), 기인 제도(其人制度)
별칭•이칭

[정의]

신라 시대에 중앙 정부가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수도인 경주(慶州)에 머물게 했던 지방 세력의 일원 혹은 그 자제(子弟).

[내용]

신라의 상수리(上守吏) 제도는 각 주(州)의 관리 중 1명을 수도 경주로 불러 여러 관청에 머물게 한 제도를 말하는데, 서울에 머물던 지방의 관리를 지칭하여 상수리라 하였다. 이때 지방의 관리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아니라, 각 지방 토착 세력의 자제나 토착 세력을 보좌하던 일종의 상층 향리(鄕吏)였다.

이들은 원래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던 수장(首長) 계층이었으나, 신라가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하지만 해당 지역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유지하였으므로, 중앙 정부에서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그 자제 중 한 명을 서울에 불러들여 머물게 하였다. 상수리 제도는 일종의 인질 제도였지만, 상수리는 단순한 인질은 아니었다. 상수리는 서울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 지방 세력과 신라 중앙 정부를 이어 주는 소통 창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원래 다른 나라였던 지방들이 하나의 신라로 통합되어 가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상수리에 대한 설명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대의 이야기에 처음 등장하며,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 문호왕 법민(文虎王法敏) 조에 관련 기록이 전한다. 문무왕의 서제(庶弟) 거득공(車得公)이 민생을 살피고자 신분을 숨기고 평범한 옷차림으로 밀행하였을 때, 당시 무진주(武珍州)의 주리(州吏)였던 안길(安吉)의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후 안길이 수도로 올라와서 일하게 되었을 때 거득공을 대접한 공으로 왕이 성부산(星浮山) 아래의 토지를 상으로 내렸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 제도가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에는 이와 비슷한 기인(其人) 제도가 있었는데, 상수리 제도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 관련자료

ㆍ상수리
ㆍ상수리 제도
ㆍ기인(其人)
ㆍ기인제(其人制)
ㆍ기인 제도(其人制度)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