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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제목 종묘
한자명 宗廟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태묘(太廟), 묘조(廟兆)
별칭•이칭

[정의]

조선의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

[내용]

유교에서는 사람이 사망하면 몸은 무덤에 묻히더라도 그 넋은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일정 기간 지상에 머무른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넋이 깃드는 신주(神主)라는 것을 만들어 사당에 봉안하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일반인들은 이러한 사당을 집안에 만들어서 이를 가묘(家廟)라 했는데, 천자나 제후의 사당은 종묘(宗廟)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종묘는 토지신, 곡식의 신에 대한 제사와 그 장소를 의미하는 사직과 더불어 한 국가를 표현하는 상징이기도 하였다.

본래 중국에서 발원한 종묘 제도는, 신라 때부터 도입되었다. 조선의 경우 건국 직후 한양에 종묘를 설치하였는데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궁궐의 왼편에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 사직단을 둔다는 주례(周禮)의 규정에 따라 경복궁의 왼편에 자리하게 되었다.

종묘는 크게 보아 정전, 영녕전, 향대청(香大廳) 등의 부속 건물의 세 구역으로 나뉜다. 정문을 통과하면 제관들의 대기소인 향대청과 왕이 목욕하고 의복을 정제하던 어숙실(御肅室)이 있으며, 어숙실 서북편으로 총 19칸의 정전(正殿)이 있다. 정전은 한 건물이 가로로 길게 뻗은 형태에 여러 칸으로 나누어져 있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왕의 신주가 늘어날 때마다 묘실을 옆으로 한 칸씩 증축했기 때문이다. 각 칸에는 한 국왕과 해당 국왕의 왕비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가장 왼편이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이며 대수를 내려올수록 오른편으로 자리 잡도록 되어 있다. 정전을 등지고 맞은편 왼쪽에는 공신당을 두어 각 왕대별로 공이 큰 신하들의 신주를 모셨고, 오른쪽에는 칠사당을 두어 제향 때마다 함께 제사를 올렸다. 또한 대(代) 수가 지나 종묘 정전에 계속 모실 수 없는 물러난 신주들을 모시기 위하여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에 정전 서북편 뒤에 따로 영녕전(永寧殿)이 세워졌다. 영녕전 역시 최초 건축 이후 신주가 늘어나면서 좌우로 증축되어 모두 16칸이 되었다.

종묘의 신주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증가하는데, 원칙적으로는 당대 국왕의 4대조가 넘어가는 경우는 친진(親盡)이라 하여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친진된 국왕이 당대 국왕과 직계 조상인 경우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불천위(不遷位)로 인정하여 계속 정전에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생전에 왕권이 미약하고 직계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국왕의 경우만 영녕전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불천위 수의 증가로 종묘의 신실은 계속 증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수차례 증축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종묘가 소실되자, 난이 수습된 직후 중건되어 1608년(광해군 즉위)에 완성되었다. 이후 왕조가 지속되면서 여러 차례 증축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모두 19명의 왕과 30명의 왕비가 종묘 정전에 모셔져 있다.

▶ 관련자료

ㆍ조(祧)
ㆍ종묘(宗廟)
ㆍ태묘(太廟)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