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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

제목 경연
한자명 經筵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경악(經幄), 경유(經帷)
별칭•이칭

[정의]

국왕이 신하와 함께 유학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공부하고 토의하는 학술 제도.

[내용]

국왕이 유학의 경서와 역사를 공부하고 신하와 함께 토의하면서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자질을 갖추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학술 제도이다. 하지만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 이후에는 경연에서 국왕과 신료들이 단순하게 학술 토의만 진행했던 것이 아니라 국정 운영 전반에 관한 문제 등을 함께 토론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 한나라 때 유학자들이 황제에게 오경(五經)을 강의했던 제도에서 시작되었다. 고려 예종(睿宗, 1079~1122) 대에 경연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당시에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조선 건국 후 태조(太祖, 재위 1392~1398)는 경연청을 설치하면서 경연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아직 경연이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과 성종은 자신의 재위기 동안 경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용했다. 따라서 경연의 위상이 국정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와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이 경연을 폐지하기도 했지만 이후에 제도가 다시 부활해서 중요한 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했다.

경연관은 당상관과 낭청(郎廳)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 겸직이었다. 당상관으로는 3정승은 물론 국왕의 비서 역할을 했던 여섯 승지와 홍문관부제학이 모두 순번에 따라 경연에 참석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 낭청은 세종 때는 집현전 관리들이 전담하였으며, 이후에는 집현전의 학문 연구 기능을 이어받은 홍문관의 관리들이 담당했다. 조선 후기에는 벼슬하지 않는 재야의 학자를 특별히 참석시키기도 하였고,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대에는 문예면에서 규장각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규장각 각신들이 경연관의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경연은 매일 이른 아침에 조강(朝講)을 실시하였으며, 정오에 주강(晝講), 오후 2시경에 실시하는 석강(夕講)을 포함하여, 세 번 강의하는 일도 있었다. 하루에 경연을 3번 실시하는 것은 단종(短宗, 재위 1452~1455)의 재위기에 처음 이루어졌는데, 성종의 재위기에 확립되었다. 강의 방식은 진행하는 신하가 교재의 내용을 음독하고 번역한 뒤, 내용을 해설했다. 강의 내용에 대해 국왕이 질문하면 강의자와 다른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하고 토론을 진행했다.

성종의 재위기부터는 강의가 끝난 뒤 국정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논의하기도 했다. 경연은 겸직의 특성상 의정부⋅6조⋅승정원⋅홍문관⋅사헌부⋅사간원 등 주요 관서의 신하들이 참석하였으므로 정책 심의를 위한 회의의 성격을 함께 갖게 되었다.

▶ 관련자료

ㆍ경연(經筵)
ㆍ경연관(經筵官)
ㆍ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