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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

제목 양명학
한자명 陽明學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명(明)
유의어 육왕학(陸王學), 왕학(王學), 심학(心學)
별칭•이칭

[정의]

명나라의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이 제창한 신유학(新儒學)의 한 갈래.

[내용]

주희(朱熹, 1130~1200) 사후 270년 후에 태어난 왕수인은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 자리 잡은 주자학에 의심을 품고 주희의 주석과 다른 새로운 경전 해석을 통해 명나라에서 새로운 학풍을 이끌었다. 주희의 ‘성즉리(性卽理)’와 달리 왕수인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다. 주희에게 있어 리(理)는 기(氣)로 이루어진 현상 세계가 있게 하는 원인이며, 양자는 밀접하더라도 동시에 구별된다. 따라서 마음도 리와 기로 이루어진 것이며, 내 마음의 작용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외물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리를 널리 탐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왕수인은 우주 만물의 이치이자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리(理)’가 이미 마음[心]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외부에서 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외부 세계를 지각하고 판단하는 마음의 전체적인 역할에 더 주목하였다. 그러므로 주희가 외물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 경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리(理)’를 알아야 행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한 반면, 왕수인은 이미 마음속에 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실천할 수 있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였다. 또한 인간이 보편적으로 타고난 도덕적 능력을 양지(良知)라 칭하였다.

따라서 왕수인은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해석도 주희와 달랐다. ‘외부의 사물에 이르러 그 앎[知]을 다한다’는 주희의 해석과 달리 그는 물(物)을 ‘사(事)’의 의미로, 더 넓게는 현실의 대상이나 일을 마음이 받아들여 생겨난 사념(思念)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지(知)는 ‘양지(良知)’로 보아 ‘내면에 존재하는 일을 바로잡아 양지(良知)에 이른다’고 해석하였다. 이처럼 내면을 바로잡는 주체의 도덕적 결단을 강조한 것이다. 왕수인의 학설은 부담스러운 학습의 단계를 과감히 제거함으로써 수양에서 실천의 측면을 더욱 부각하였다. 그는 수양이란 정좌, 독서, 토론 강습뿐 아니라 개개인이 일상에서 활동하고 대처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선비가 아닌 농민, 수공업자, 상인 계층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양명학이 명나라 중기 발흥하여 중국 내 새로운 사회 질서를 탐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양명학이 조선에 유입된 것은 대개 16세기 초 중종 대이며 명종 때에 학계에 이미 널리 알려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유교의 범위 안에 있더라도 조선 후기 주자학과 위배되는 사상은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매도되어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양명학은 사상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주자학에 의해 끊임없이 견제를 당하며 명맥만 유지해 오다 소론계 정제두(鄭齊斗, 1649~1736)에 의해 꽃을 피우게 되었다. 정제두는 만년에 강화도로 거처를 옮기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양명학 연구에 몰두하여 ‘강화학파(江華學派)’를 형성했다. 강화학파에는 양명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학문적 조류가 있으나 그 기반은 양명학에 있었다.

정제두 사후 강화도에서 가학(家學)으로 전해지던 양명학은 개혁과 실천 지향적 정신으로 조선 후기 실학과 조선 말 구국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관련자료

ㆍ심학(心學)
ㆍ양명학(陽明學)
ㆍ왕학자(王學者)
ㆍ육왕학파(陸王學派)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