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용어 해설유형별 > 전체

탕평책

제목 탕평책
한자명 蕩平策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탕평 정치(蕩平政治), 탕평(蕩平)
별칭•이칭

[정의]

조선 후기 영조⋅정조 시기 붕당 간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공존하기 위해 추진된 정책.

[내용]

‘탕평(蕩平)’은 『서경(書經)』 「홍범편(洪範篇)」에 나온 말로, 정치는 당파를 초월한 군주가 중심이 되어 중립적이고 바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탕평책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이다. 박세채는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직후 노론과 소론의 분열이 시작될 무렵 중립적 입장에서 서인 전체를 다시 화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신하가 주도하는 정국을 군주가 주도하는 정국으로 바꾸어서 서인과 남인의 극한 갈등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세채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비론(是非論)’이 아니라 ‘우수함과 열등함’을 판단하는 ‘우열론(優劣論)’을 제시하였다. 즉 반대당을 모조리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열에 따라 인재를 골라 쓰자는 정국 운영의 원칙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반대당을 숙청하는 방식의 환국 정치를 계속 이어갔으며, 이에 따라 당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박세채의 탕평론을 수용한 것은 숙종에 뒤이어 즉위한 영조에 의해서이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즉위 초부터 ‘탕평’을 표방했다. 그러나 집권 초반에는 과거의 관행이 이어지면서 소론 정권에서 노론 정권으로, 또다시 소론 정권으로 바뀌는 환국 정치가 계속되었다. 1728년(영조 4) 소론⋅남인 급진파에 의한 전국 규모의 반란인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자, 이를 수습한 영조는 붕당 타파를 전면에 내세운 기유대처분(己酉大處分)을 내림으로써 탕평책을 통한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강경파를 물러나게 하고 노론, 소론의 온건파들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들 온건파를 일컬어 완론(緩論)이라 했다. 노⋅소론 탕평파는 점차 군주의 척신이 주도하는 당여(黨與)로 변질되어 왕실 외척이 정국 운영을 주도하게 되었고, 세간에서 이들을 ‘탕평당’이라고 불렀다.

영조 연간의 탕평당을 비판했던 강경파는 대체로 준론(峻論)이라고 한다. 이들은 척신당을 견제했던 정파로 의리와 명분, 절의를 숭상하며 영조의 탕평책에 비판적이었기에 영조 당시에는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정조 즉위 후 깊은 신임을 받으며 집권 주류를 형성하였다.

[의의]

탕평책은 붕당 간의 극단적인 갈등을 초래한 환국 정치의 대안으로 갈등을 줄이고 공존하면서 군주를 중심으로 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집권 후기에 인척을 통해 권력을 안정시키고자 함으로써 후일 세도 정치의 빌미를 제공했다.

▶ 관련자료

ㆍ완론탕평(緩論蕩平)
ㆍ준론탕평(峻論蕩平)
ㆍ탕탕평평(蕩蕩平平)
ㆍ탕평(蕩平)
ㆍ탕평론(蕩平論)
ㆍ탕평정치(蕩平政治)
ㆍ탕평책(蕩平策)
ㆍ탕평파(蕩平派)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