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용어 해설유형별 > 전체

황사영 백서

제목 황사영 백서
한자명 黃嗣永帛書
유형
시대 조선 시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가톨릭 신자인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이 박해 소식과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을 알리기 위해 중국 북경 교구장 구베아(Alexandre de Gouvea)에게 보내려고 했던 밀서.

[내용]

백서(帛書)는 비단에 쓰인 글을 가리킨다.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이 베이징 교구장인 구베아에게 비단에 써서 보내려던 글이다. 영세명이 알렉산드로인 황사영은 서울 출신으로 16세 나이에 장원 급제한 바 있으며,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친히 등용을 약속할 만큼 전도유망한 인재였다. 그러나 황사영은 정약종을 통해 천주학을 접한 뒤 주문모(周文謨)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으면서 천주교도의 길을 걷게 된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황사영은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배론[舟論]에 숨어들어 토굴에서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 방안을 호소하는 글을 썼다. 그리고 그 백서를 중국에 가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인 황심⋅옥천희 등을 통해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했으나 중도에 발각되고 말았다.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은 역모를 꾀한 대역 죄인이 되어 27세의 나이에 능지처참이라는 극형에 처해졌다.

백서의 내용에는 조선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과정, 순교자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미에 조선 교회가 일어설 수 있는 방안으로 서양인 선교사 파견 및 조선의 청나라 편입, 서양의 군대 출병 등 조선 정부에서 수용할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이후 조선 정부는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백서의 원본을 살펴보면, 길이 62㎝, 너비 38㎝의 흰 비단에 1만 3311자를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어내려 갔다.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던 원본은 1894년(고종 31)에야 비로소 공개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다.

▶ 관련자료

ㆍ백서(帛書)
ㆍ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백서
ㆍ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흉서(凶書)
ㆍ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