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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의병

제목 을사의병
한자명 乙巳義兵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대한제국,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등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기 위해 봉기한 항일 의병.

[내용]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개전 직후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 협약 체결을 강제하여 군사적, 정치적 침탈을 강화해 갔다. 러일 전쟁이 종결되자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보호국화하였다. 외교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한국민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반일 투쟁은 거세졌다. 의병 역시 다시 봉기하여 전국적인 규모의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어 갔다.

먼저 1905년 5월에 원주의 원용팔(元容八), 박정수(朴貞洙), 단양의 정운경(鄭雲慶)이 의병을 일으켰다. 또 12월에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전덕원(全德元)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홍주에서는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의병 항쟁이 활발하게 전개된 곳은 호남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먼저 태인의 최익현(崔益鉉)이 문인들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이 이끈 의병 부대는 일본의 압력으로 출병한 진위대(鎭衛隊)와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공격을 당하여 최익현을 비롯한 의병장들이 체포되었다. 최익현이 이끈 의병 부대는 진압되었지만 뒤이어 광양의 백낙구(白樂九), 담양의 고광순(高光洵) 등이 이끈 의병이 거사하는 등 호남 각지에서 의병의 기세는 점차 고조되어 갔다. 그리고 영남 일대에서도 의병 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을사의병은 이전의 을미의병에서 나타났던 지역성, 학통성, 혈연성과 같은 한계를 극복해 가는 특징을 보여 준다. 또 의병을 주도하고 참여하는 신분층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즉 을미의병에서는 유생 의병장이 중심이 되어 자신의 문하에 있던 유생들을 이끌고 거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을사의병에서는 신돌석(申乭石)과 같은 평민 의병장이 등장하고 농민층이 대거 의병에 참여하는 등 의병 참여층이 더욱 확대되었다.

을사의병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이 가담하면서 전력이 강화되고 활동이 더욱 확대되는 정미의병으로 발전해 갔다.

▶ 관련자료

ㆍ을사늑약 이후 의병 운동
ㆍ을사의병(乙巳義兵)
ㆍ을사조약 때의 의병
ㆍ의병 봉기(義兵蜂起)
ㆍ의병 전쟁(義兵戰爭)
ㆍ의병(義兵)
ㆍ의병장(義兵將)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