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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화약

제목 전주 화약
한자명 全州和約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조선, 청(淸), 일본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894년 5월에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과 조선 정부가 맺은 화약(和約).

[내용]

고부 농민 봉기의 사후 처리를 위해 안핵사로 임명된 이용태(李容泰)가 동학교도를 탄압하자, 1894년 4월에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동학 접주들과 함께 고창(高敞)의 무장현(茂長縣)에서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내세운 창의문을 발표하고 봉기를 단행했다.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점령하자 정부는 4월 2일에 홍계훈(洪啓薰, ?~1895)을 초토사로 임명해서 동학 농민군 진압을 명령했다. 홍계훈은 4월 7일에 장위영(壯衛營) 병정 800여 명을 이끌고 전주성에 입성했지만, 그 병력으로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정부에 증원군 파견을 요청하였다. 정부는 홍계훈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16일에 강화도 수비병을 전주로 급파하였다. 정부의 병력 파견을 확인한 홍계훈은 4월 18일에 전주성을 나와서 동학 농민군의 진압을 시도했으나, 23일 장성에서 동학 농민군에게 패배했다. 장성에서 패전보고를 받은 정부는 4월 27일에 이원회(李元會)를 양호순변사(兩湖巡邊使)로 삼고 강화 및 청주의 병력을 추가로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장성에서 관군을 무찌른 동학 농민군은 기세를 몰아서 정읍, 태인, 금구를 거쳐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 인근에서 지속된 관군과 수차례 공방전에서 많은 인적 손실을 입었다. 특히 5월 3일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은 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파병 요청을 수락한 청국 군대가 동학 농민군의 진압을 위해서 5월 5일과 7일에 아산만에 상륙했다. 청군이 출병하자 일본 역시 톈진 조약(天津條約)을 근거로 5월 6일에 군대를 제물포에 상륙시켰다. 전봉준은 청국과 일본에게 군대 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관군에 폐정 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이를 정부가 받아들인다면 동학 농민군을 해산하겠다는 강화안을 정부 측에 제시했다. 홍계훈이 전봉준의 강화안을 수락함으로써, 동학 농민군과 정부군은 5월 7일에 전주 화약을 체결했다. 전주 화약으로 동학 농민군과 정부는 전라도 지역의 개혁 사무를 관장할 자치 기구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을 실시하는 대신에 동학 농민군의 해산에 합의했다. 전주 화약이 체결된 직후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집강소를 설치해서 폐정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 관련자료

ㆍ전주 화약(全州和約)
ㆍ동학 농민 운동(東學 農民 運動)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