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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주전론

제목 척화주전론
한자명 斥和主戰論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조선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860~70년대 조선의 역사적 사건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배외 의식(排外意識).

[내용]

1866년(고종 3) 초 조선 정부는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와 신자를 박해하였다. 자국 신부의 죽음에 대한 항의로 프랑스는 군함을 파견하여 강화도 일대에 대한 공격⋅점령을 감행하였다. 조선군의 2개월에 걸친 항쟁으로 프랑스군은 철수하였다.(병인양요) 한편 같은 해 여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General Sherman號)가 통상을 요구하며 평양 대동강까지 올라갔고, 당시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이를 거절하고 배를 격침시켰다. 미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손해 배상 요구와 통상 요구를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결국 1871년 상륙 작전을 통해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을 점거하였다. 미국군은 수자기(帥字旗)를 약탈하는 등 조선 측에 피해를 입혔다.(신미양요) 또한 1868년에는 독일인 오페르트(E. J. Oppert)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조선 내부의 반외세 감정은 비등해졌다. 정부 내부의 관료들, 재야의 선비들까지 모두 “서양 오랑캐와 화의하는 것에 반대하고 힘껏 싸워야 한다”는 주장, 곧 척화주전론을 내세웠다. 척화주전론은 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격퇴한 후 1871년(고종 8)에 세운 척화비(斥和碑)에 잘 나타나 있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는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으로 이어져, 1880년대 초반 개화사상과 대립하게 되었다.

▶ 관련자료

ㆍ주전론(主戰論)
ㆍ척화(斥和)
ㆍ척화비(斥和碑)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