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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로한족회중앙총회

제목 전로한족회중앙총회
한자명 全露韓族會中央總會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러시아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7년 5월 러시아 니콜스크-우수리스크(Nikolsk-Ussurysk) 시에서 결성된 러시아 거주 한인들의 대표적 자치 단체이자 항일 독립운동 단체.

[내용]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조직되어 활동하던 한인 자치 단체인 권업회(勸業會)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제와의 관계를 고려한 제정 러시아 당국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 또한 이강(李剛)⋅정재관(鄭在寬)⋅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 민족 운동 지도자들에 대해 체포 추방령을 내림으로써 한인들의 항일 활동을 위축시켰다. 그렇지만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정치적 운신 폭이 대폭 확대되었다. 1917년 4월 문창범(文昌範), 최재형(崔才亨)이 주도하는 ‘노령한인협회발기회’ 명의로 러시아령 한인 사회의 자치적 대표 기관 창설을 목적으로 하는 대회 소집이 발의되었고, 6월에 연해주 내륙의 중심 도시 중에 하나인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에서 대회가 개최되었다. 회의에는 인구 비례에 의거하여 선정된 러시아령 극동에 소재하는 각 지역 한족회, 군인회, 교사회, 농민동맹 등에서 96명의 대표자가 참석했다. 대표자의 2/3는 러시아에 귀화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원호인(原戶人)이었으며, 1/3은 귀화하지 않은 여호인(餘戶人)이었다. 대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원호인들이 여호인들에게는 발언권만 인정하고 의결권은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이 야기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러시아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인이 어떤 세력을 지지할지 여부를 두고 극심한 대립이 벌어졌다. 케렌스키(Aleksandr Fyodorovich Kerensky)를 수반으로 하는 러시아 임시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이 다수였고, 볼셰비키의 소비에트(Soviet)를 지지하는 세력이 소수였다. 결국 소수파는 대회장에서 탈퇴했고, 잔류한 다수파는 고려족중앙총회를 설립했다. 고려족중앙총회는 귀화 한국인들의 자치제를 실행하기 위한 상설적 중앙 기관이었으며, 러시아 귀화 한국인만을 조직 대상으로 하였다. 기관지로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에 신문사를 설립하고 한국어 신문인 〈청구신보(靑邱新報)〉를 발행했다. 반면에 소비에트를 지지하며 탈퇴한 세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어 신문인 〈한인신보(韓人新報)〉 발행에 참여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별도로 ‘아령한인회(俄領韓人會)’ 결성을 추진했다.

분열됐던 두 한인회는 1918년 1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로 통합하는 데 합의했다. 기존의 기관지인 〈청구신보〉를 〈한족공보(韓族公報)〉로 개칭하여 새로운 기관지로 삼았으며, 민족 교육 강화를 위해 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사범 학교 설립을 결정했다. 그러나 1918년 6월 열린 전로한족회중앙총회 회의에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입장 차이로 또다시 대립이 일어났다. 한편 새롭게 구성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지도부는 회장 문창범을 비롯하여, 윤해(尹海), 채(蔡)안드레이, 김(金)주프로프, 김(金)야코프, 원세훈(元世勳), 한여결(韓汝潔)의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1919년 2월 25일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에서 회의를 개최했는데, 북만주의 한인 지도자들도 참석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국제 정세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회의 결과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북간도 한인을 포함하는 대한 국민 의회(大韓國民議會)로 조직을 개편하고, 윤해와 고창일(高昌一) 2명을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