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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제목 매일신보
한자명 每日申報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1910년 8월 30일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 바꿔 창간한 조선 총독부의 한글 기관지.

[내용]

한국 통감부와 조선 총독부는 한국에서 언론 기관을 직접 경영하거나 친일 언론을 육성하여 침략을 위한 선전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 강제 병합 후 총독부는 조선인의 신문 발행을 불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 경영 신문까지도 폐간을 종용하였다. 총독부는 3개 언어로 된 기관지를 발행하였는데, 일본어의 〈경성일보〉, 영어의 〈서울프레스〉, 그리고 한글 〈매일신보(每日申報)〉가 그것이다. 〈매일신보〉는 1904년 창간한 민족 언론 〈대한매일신보〉를 개제(改題)하는 형식으로 하여 1910년 8월 30일 창간되었다.

창간 직후인 1910년 10월 12일에는 전 〈제국신문〉 사장 정운복(鄭雲復)이 주필로, 11월에는 발행 겸 편집인에 변일(卞一)이 임명되었다. 사옥은 경성일보사 구내에 위치했으며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 편집국 아래 한 개의 부(部) 수준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20년 기구 개편을 단행하여 〈매일신보〉 편집국이 설치되었으며, 그 아래 논설부와 편집부, 외사부(外事部), 사회부, 지방부를 두었다. 1924년 12월 18일부터는 1면 정치, 2면 사회, 3면 사설 및 지방, 4면 경제면으로 지면을 새롭게 배치했다. 1930년 2월 11일에는 4면 발행에서 8면 발행으로 지면이 확대되었다. 이후 1938년 4월 29일 경성일보사에서 독립하여 새롭게 〈매일신보(每日新報)〉로 개제하였다. 이때 사장에 최린(1941년 이후 이성근 취임), 부사장 이상협, 전무에 후쿠에 시카요시(福岡鹿好), 편집국장 김형원(이후 류광렬, 김린, 이성근 역임), 영업국장 이상길이었다. 이 외의 경영 요직에는 일본인이 임명되었다.

〈매일신보〉는 〈경성일보〉와 함께 ‘시정(施政)의 부연 철저, 민의의 창달, 문화의 향상’ 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총독 정치의 선전과 홍보에 앞장섰다.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이후 〈중외일보〉, 〈중앙일보〉) 등 한국인이 발행한 ‘민간지’와 논전을 벌이면서 경쟁하였다. 그렇지만 다른 한글 신문이 허용되지 않았던 1910년대에는 〈매일신보〉가 현재 문학사에 이름 있는 여러 작가의 발표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인직(李仁稙)은 「혈의 누」(1906년)의 속편을 1913년 발표했고, 이해조(李海朝) 역시 여러 호에 걸쳐 「춘외춘(春外春)」 등의 소설을 실었다. 무엇보다 이광수의 장편 소설 「무정」이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126회에 걸쳐 연재되며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었다.

해방 후 사장 이성근이 물러나고 〈매일신보〉에는 사원자치위원회가 조직되어 계속 신문을 발행하였다. 이후 미군이 진주하여 1945년 10월 2일 매일신보사를 접수했다. 미 군정은 주주 대표 및 사원자치위원회와 타협 끝에 사장 오세창, 부사장 하경덕, 전무 김동준, 주필 이관구, 편집국장 홍기문, 감사역 윤희순, 고문 권동진, 홍명희 등으로 하는 새 간부진을 탄생시켰다. 새 간부진은 11월 23일부터 〈서울신문〉으로 개제하고 속간했다.

▶ 관련자료

ㆍ매일신보(每日申報)
ㆍ매일신보(每日申報)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