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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론

제목 자치론
한자명 自治論
유형
시대 근대
관련국가
유의어 자치운동론(自治運動論)
별칭•이칭

[정의]

일제 지배 아래에서 식민지 조선에 독자적 의회를 설치하고 일정 부분 내정의 자치권을 부여하자는 주장.

[내용]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일본의 국방상⋅안보상 사활적 위치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군부를 비롯해 일제 권력 핵심부는 조선의 경영에 큰 주의를 두고 있었고, 식민지 조선에 일체의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제는 제국을 통치하는 데 있어 본국인 내지(內地)와 식민지인 외지(外地)를 정치적으로 차별하여, 식민지 조선에 수십 만여 명의 일본인이 진출했음에도 이들 재조일본인에게는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때문에 재조일본인들의 상당수는 참정권, 곧 일본 중의원 선거권 및 귀족원 선임권을 요구하거나 또는 자치권, 곧 식민지 조선에 독자적인 자치 의회를 설립해 줄 것을 희망하였다. 또한 일제의 한국 지배에 협력한 친일파 한국인들도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식민 통치를 인정한 위에서 자치적인 권리를 얻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였다.

1919년 전 민족적 항쟁인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 통치는 커다란 변화에 처하게 되었다. 일제 군부는 3⋅1 운동을 강제 진압하였지만, 3⋅1 운동 발발의 책임 문제와 일본 본국에서의 특권 번벌 세력의 약화 및 정당 정치 진전에 따라 식민 통치에서 일시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종래의 무단 통치에서 ‘내지 연장주의’와 ‘문화 정치’를 내세우며 식민 통치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본국과 식민지와의 차별은 상당수 남아 있었고, 여전히 정치적 권리는 부여하지 않았다. 재조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차별도 여전하였다. 그렇지만 육군 특권 세력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정당 세력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식민지 조선 내의 재조일본인과 친일파 한국인들 사이에서 참정권과 자치권을 주장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3⋅1 운동 직후 유민회(維民會)는 자치 청원 운동을, 1922년 동광회(同光會)와 내정독립기성회 등은 내정 독립을 주장하며 자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4년 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와 ‘각파유지연맹’ 등도 참정권 운동과 자치제 운동을 추진하였다.

한편 일제의 무단 통치가 결국은 한민족의 전국적 항쟁인 3⋅1 운동을 발발하게 하여 식민 통치에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는 일본 식민학자, 일본 내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과 헌정회 계열의 정치인 등에서도 식민지 조선에서 자치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자치제 주장은 식민 통치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한국인이 중심이 되는 자치가 아니라, 재조일본인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한국인을 일부 참가시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자치제 주장도 식민지 조선이 일본의 안보⋅국방상 갖는 전략적 위치, 군부의 반발, 추밀원과 궁정, 귀족원, 일본 관료집단 내 보수 세력들의 강한 거부감, 정⋅관계와 민간의 국가주의 세력의 반발, 우경화하는 국민 정서 등에 의해 1920년대 중반부터 소멸되어 갔다.

1924년 일본에 헌정회 연립내각이 수립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정무총감 이하 일정한 인사 개편이 이루어지고, 일부 총독부 관료들을 중심으로 자치제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편 미츠야 미야마츠(三矢宮松) 경무국장과 사이토 마고토(齋藤實)의 자문인 아베 미츠이에(阿部充家)는 경성일보사장 소에지마 미치마사(副島道正)를 내세워 자치제를 매개로 한국의 민족주의 세력과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려는 자치 공작을 전개하였다.

천도교 신파의 최린(崔麟) 등 일부 세력은 이에 연결되었지만, 대부분 한국 민족 운동 세력에게는 외면받았다. 한국 민족 운동 세력들은 1926년 국공 합작에 기반을 둔 중국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계기로 적극적인 민족 운동 단체 결성에 나서, 결국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합한 민족 협동 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한국의 민족 운동이 급진전하자, 사이토 총독은 일부 측근을 통해 비밀리에 참정권안과 예산과 결산 심의 등에 제한적인 권한을 갖는 조선지방의회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독자적 의회 설치를 주장하는 기존의 조선의회안이나 내정독립론에서 훨씬 후퇴한 것이었고, 내용에서도 총독부가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완전히 통제하면서, 재조일본인이 중심이 되는 대단히 문제가 많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조차도 본국 정부와 제대로 협의도 못한 채 사문화되고 말았다. 사이토는 조선 총독에서 물러났다가 1929년 조선 총독으로 재부임하는데, 이때 그는 조선 총독부 관료들과 함께 조선지방의회안을 다시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안은 1927년에 마련한 방안보다도 더욱 후퇴된 구상이었고 10년 후에나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안조차도 일본 보수 세력의 반대에 부딪치자 곧바로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방 제도 개정에만 합의하면서 도⋅부⋅면회를 대단히 제한된 권한만을 갖는 의결 기관으로 한다는 지방 행정 제도 개선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1920년대 제기되었던 자치론은 결국 일제의 지방 행정 제도 개선책으로 귀결되게 된다. 일제의 이런 지방 행정 제도 개선에 대해 대부분 민족 운동 세력은 크게 반발하면서 거부했으나, 일부 세력은 변절하여 이에 참여하였다.

일제 강점하의 자치론은 1920년대 들어 식민 통치의 안정적 지배와 재조일본인의 정치적 요구를 위해서 재조일본인과 토착 총독부 관료, 일본 식민학자, 자유주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서 제기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식민통치를 인정한 위에서 자치적인 권리를 얻어야 한다는 친일파 한국인들이 이에 적극 가담하였다. 여기에 총독부의 민족 분열 정책에 회유된 일부 민족 운동 세력이 참여하면서 일제 식민 통치 지배에 이용되게 되었다.

▶ 관련자료

ㆍ자치론(自治論)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